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집에 자가용이 있는지, 월소득이 얼마인지, 부모님 직업은 무엇인지 등을 적어내는 것인데 공란으로 적어내면 다시 써오라는 꾸지람을 듣곤 했다. 가정환경조사를 하면 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부모님의 학력을 묻는 난이었는데 고졸, 중졸인 당신들은 항상 대졸, 고졸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학력을 기재하곤 하셨다. 그렇지 않다는 걸 뻔히 아는데 왜 꼭 거짓으로 학력을 높였을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아마 궁색한 대답에 오히려 상처를 받지 않을까 싶었던 게 아닐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이 있다. 학력이 낮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다. 대학에 다닐 때,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들의 대화에서 아무개는 대입 시험 성적과 무관하게 어느 대학을 갔다는 얘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운좋게(혹은 부정한 방법으로) 특기생으로 입학한 그 친구가 미국 유학까지 가서 박사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누군가로부터 질투와 분노가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대학이 인생의 절반 이상이라고 믿었던 입장에서 고등학교 때 공부 못하던 친구가 이뤄낸 그 성과는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대학이 별게 아니란 걸 충분히 알 나이가 됐건만 여전히 고등학교 때 성적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습관에 물든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가정환경조사에서 거짓으로 학력을 기재하던 시절에서 한 세대가 지났건만 성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버릇은 세대를 뛰어넘고 있었다.
요즘 학력 검증이 한창이다. 신정아씨 사건에서 시작해서 요즘엔 연예계가 집중공략 대상이 됐다. 거짓말을 한 자들을 용서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높은데 나의 느낌으론 연예인에 비해 훨씬 심한 거짓말을 많이 했던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에 비해 강도 높은 비난이 쏟아지는 것 같다.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일으키는 걸 보면서 여전히 우리 사회는 학력에 관해서는 특별히 예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이를 속이거나 성형 여부를 속이는 것에 관대한 데 비해 학력에 관한 거짓말엔 격한 비난을 가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인물이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란 기존의 이미지 때문일까? 아님 그 인물의 허위 학력이 출세의 결정적 디딤돌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개인의 잘못을 따지자면 둘 다 타당성있는 얘기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연예인의 경력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한 개인을 분노의 표적으로 삼는 걸 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학력이라는 기준에 심하게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네이버에서 연예인 이름을 치면 기본 정보로 그 사람의 학력이 검색된다.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가 나오는데 딱 우리 사회의 편견에 맞게 디자인됐다는 느낌이다. 배우에게 학력이 중요한 정보라고 판단하는 한 학력에 관한 거짓말과 그 거짓말에 대한 분노가 똑같이 들끓는 것이 아닐까. 이번 사태를 보면 누구나 나는 학력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라고 선서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묘하게 위협하는 이런 분위기가 학력에 대한 편견을 더욱 굳건히 할까 걱정스럽다. 거짓말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에 기겁을 하며 모두 몰려가 돌을 던지자고 선동하거나 모두에게 자백을 권하는 사회도 결코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20년도 지난 고등학교 때 기록을 뒤져 대학에 합격했던 증거를 찾아내는 투철한 기자 정신이 이번만큼은 어쩐지 무섭다.
P.S. 이번호부터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영화박물관에 들어갈 물품을 기증받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한다. 기획기사 ‘한국영화의 기억을 찾아라’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한국영화와 한국의 영화사에 관해 공유할 자료를 매주 하나씩 소개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도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할 물품이 있다고 판단되면 주저 말고 연락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