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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같은 소녀의 동물적 열정
장미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7-08-16

<기담>의 고주연

고주연의 얼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깊고 또렷한 눈매다. 천진함보다는 묘한 감상을 감춘 듯한 그 눈을 보노라면 이 배우의 잠재력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야 또박또박 이치에 맞게 전달하지만, 시선이라도 마주칠라치면 슥 고개를 돌려버리는 수줍음처럼 소녀의 목소리는 작고 떨렸다. 인터뷰 내내 두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던 모습은 이 배우가 <기담>에서 극한의 공포를 격렬하게 전달하던 그 아이가 맞는지 새삼 의심케 하기도 했다. 정가형제 감독의 <기담>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안생병원이라는 신식병원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은 호러물이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뒤얽힌 등장인물 중 고주연이 연기한 이는 교통사고로 엄마와 새아빠를 모두 잃은 채 혼자 살아남은 아사코. 새아빠를 끔찍이 소망할 만큼 조숙하고, 엄마를 증오할 만큼 충분히 이기적이며, 홀로 살아남은 죄의식에 밤새 진저리칠 만큼 여전히 여린 캐릭터다.

스크린에서 제법 오래 얼굴을 드러낸 작품이라곤 <낭만자객> <청연> <구미호가족>이 전부인데 왜 어렵지 않았을까. 또래배우 하나 없는 이 영화에서 1994년생의 어린 배우는 그러나 김태우, 김보경, 진구, 이동규 등 어른 배우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드러낸데다 관객의 눈과 귀를 홀릴 만한 기괴하고 처연한 진심까지 미묘하게 흘려넣었다. 영화에 대한 평에서 그의 연기에 대한 호의가 제법 눈에 띄는 것은, 스스로는 “코가 약해서”라며 말꼬리를 흐렸지만 연기 중 코피까지 터뜨릴 정도의 열성이 있어서가 아닐까. 물론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고주연의 말투는 여전히 조곤조곤하고 침착했다. “마음의 상처가 많은 아이인 것 같아요. 사고가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닌데 뭐든지 다 자기 탓으로 돌리고. 그래서 자책하는 그런 캐릭터예요. 해보지 않은 연기였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감독님께서 아사코가 왜 발작을 하는지 콘티를 주시면서 설명해주셨어요. 이때 아사코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사코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면서 했어요.”

식물처럼 찬찬히 소리없이 움직이는 고주연의 취미는 독서. 촬영을 기다리는 시간을 함께 보낸 것도 이른바 명작이라고 불리는 전세계의 소설책이었다. <기담> 현장에선 무슨 책을 읽었을까 궁금해하니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라고 속살댔다. 세상을 떠돌며 지식과 쾌락을 좇던 골드문트의 여정이 느껴졌다. “맘에 드는 캐릭터요? 캐릭터마다 달라요. 이 캐릭터의 성격에서 좋은 점도 있고, 저 캐릭터의 성격에서 좋은 점도 있기 때문에 한 가지만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웃음) 음, 골드문트가 하나하나 사건을 겪어가면서 자기가 몰랐던 깨달음을 얻는 장면들이 재미있었어요. 그전에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읽었고요. 세계명작집 같은 것도 읽었어요.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제인 오스틴. 영화 <오만과 편견>은 아직 못 봤어요.” 책을 끼고 사는 대신 유독 말수가 적은 탓에 그가 먼저 말을 걸면 촬영장의 스탭들이 무척 기뻐했을 정도라고 자리를 함께한 영화사 직원이 귀띔했다.

어린 나이에 뛰어든 연기 생활. 허공을 떠다니듯 바쁘고 정신없을 일상. 다른 친구들은 경험하지 못할 화려하지만 고통스러울 프로페셔널의 세계. 시작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고주연은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CF으로 데뷔해 2001년 드라마 <홍국영>으로 처음 연기를 접하고, 드라마 <서울 1945> <눈의 여왕> <마왕>과 <와니와 준하> <청연> 등에서 한은정, 성유리, 신민아, 장진영, 김희선의 아역으로 출연하고, <낭만자객>에서 억울하게 죽는 요이(김민종)의 동생 달래, <구미호가족>에서 미심쩍은 짓만 골라하는 막내 구미호를 연기하며 오롯이 자신의 캐릭터를 맡기까지. 장르만 봐도 녹록지 않은 필모그래피지만 영화 초반에 맞춘 의상이 매번 작아질 정도로 쑥쑥 자라고 있는 그에겐 앞으로 써나가야 할 페이지가 더욱 많다. “연기요?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다르잖아요. 그런 다양한 내용을 촬영하는 게 재미있어요.” 수학보다 국어를 좋아한다는 고주연은 지금, 연기자라는 직업이 선사하는 다채로운 이야기의 책장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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