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정은 인터뷰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라고 <만남의 광장> 영화사에서 말해주었다. 못 미더워서 직접 물어보니 “인터뷰가 싫다”고 본인이 답했다. “주어진 시간 동안에 하는 일적인 대화가 싫다. 똑같은 말만 반복해야 하고, 어떤 상대를 만나서 대화해야 할지도 알 수 없고. 인터뷰는 정말 힘들고 피곤하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그렇게 힘이 드나’라고 되물으니 “우리 하루만 바꿔서 해볼까?”라고 그가 또 되물었다. 맞다. 임창정은 이번 인터뷰를 지난 2005년 2월 인터뷰와의 연장선상에서, 기자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단계의 친밀감을 갖고 임했다. 배우와 기자라는 직업적 명찰을 떼고 보면 손아랫사람인 기자에게 평어를 쓰고 스스로를 “오빠”라고 칭하는 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업무적인 관점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보니 낯선 건 사실이다. 그런데 묻는 질문에 모두 답할 뿐 아니라 친하다는 이유를 들어 더 많은 이야기를 덤으로 얹어놓게 되면 사실 일적인 입장에서도 좋은 건 좋은 거다. 임창정은 인터뷰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자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자가 들어서자 대번에 얼굴을 알아보고 “오! OOO!” 하며 기자의 이름 석자를 바로 생각해내 불렀는데, 호칭없이 이름 석자가 나온 것에 당황했고, 2년 만에 다시 보는 사람을 알아봐준 것에 감동했다. 임창정의 솔직함과 인간적인 구석의 양면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그리고 이런 것이 그가 자신의 영화와 연기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일부인 것 같다.
-재미있게 봤다. 그렇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 흥행은 잘될 거다.
-왜 그런가. =(류)승범이가 출연했으니까.
-그러게 말이다. 류승범씨 출연 부분은 정말 웃기더라. 주요 출연자 리스트에는 없는데 등장해서 처음엔 놀라기도 했다. 극의 흐름과 큰 상관없이 영화에서는 가장 웃기던데, 류승범씨를 거기 넣은 게 흥행의 의도인가. =원래 그 지뢰를 내가 밟으려고 했다니까.(류승범은 극중에서 산골 학교를 찾아가다 우연히 지뢰를 밟는 선생으로 등장한다) 이 시나리오가 탄생한 것도 결국 그 선생님 때문이잖나. 그 선생님이 마을에 발령을 받았는데 못 가게 됐고, 그래서 내가(극중 ‘고영탄’이) 얼떨결에 그 마을에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승범이에게 그 역할을 제안했는데 스케줄 때문에 못할 것 같다는 얘길 듣고 처음에는 내가 1인2역을 할까 생각할 정도로 탐이 났다.
-왜 탐이 났나. =웃기잖아.
-웃긴 게 좋은가. =웃긴 게 좋지. 사람들이 날 보고 웃는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가. 그게 또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왔고.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내가 주인공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웃길 기회가 적어졌지. 극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쉽게, 가볍게 행동할 수 없고 내가 표현할 부분에 제약이 따랐기 때문에. 그래서 언젠가 다른 영화에 카메오로 나가서 확 웃겨버리는, 그런 것도 하고 싶다.
-웃기는 게 좋은 건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재미있어해서인가, 본인이 재미있어서인가. =둘 다다.
-<만남의 광장>은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이 맘에 들어서 하게 되었나. =남북분단이라는 문제가 끼어 있어서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재밌게 풀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심각한 문제구나 생각하지 않고 웃으면서 이런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웃음의 소재로는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내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 생긴 비극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은 어떤 방법이든 쓸 수 있다는 것, 왜 우리는 만날 수 없나, 자유롭게 만나면 왜 안 되는 건가, 이런 이야기를 감독이 하고 싶었던 것 같고 그 주제를 코미디로 포장해서 만들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센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관객에게 분명 이해되는 연출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신인감독인데, 단지 그 점만을 믿고 갔던 것인가. =그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어떻게 인연이 됐나. =<위대한 유산> 때의 조감독이다. 그때부터 알고 지냈고 그때부터 믿음을 가져왔다. 내 생각이지만 그 감독은 코미디보다는 누아르를 하면 잘할 것 같다. 그쪽으로 감성이 발달했고 생각과 아이디어가 많다. 그리고 이번 영화는 워낙 임현식 선배님이나 이한위 선배님 등 베테랑들이 있으니까 나도 편했다. 그분들이 웃겨주고 승범이가 웃겨주고 그래서 코믹영화가 된 거다. 아니 코미디라기보다 멜로라면 멜로, 드라마라면 드라마, 이런 것들을 다 짊어지고 가면서 웃길 때는 웃겨주고 충분히 양념을 쳐줬다고 생각한다.
-경상도 사투리 연습은 얼마나 했나. =<1번가의 기적> 할 때부터, 부산에 살면서 친구한테 배웠는데, 안 돼, 사투리는 진짜, 하던 사람이 해야지 그게 아니면 절대 안 된다. 그리고 사투리를 하면서는 내 느낌을 제대로 표현을 못하니까 그게 미쳐버리겠다. 그래서 아마 다른 영화들에서보다 내가 더 무거워 보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장면은, 선미(박진희)가 계곡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영탄이 몰래 지켜보다가 들켜서 놀라 어딘가 숨으려고 허둥대던 순간이다. 너무 웃겼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박수를 치더니) 내가, 진짜 이 영화를 찍으면서 남들이 꼭 알아줬으면 싶은 장면이 딱 하나 있었다. 이거 하나만큼은 진짜 내가 생각해도 좋고, 남들이 알아줬음 좋겠다 싶은 장면이 있는데 그게 바로 그 장면이다. 어제와 오늘 인터뷰하면서 그 장면을 언급한 기자는 당신이 처음이다. 나 지금 소름 끼쳤어.
-어릴 때 친구들 앞에서 우는 것과 친구들을 웃기는 것과 어떤 걸 더 잘했나. =당연히 웃기는 거지. 난 우는 거 보여주는 건 너무 싫어한다. 그건 정말 싫지. 울 것 같으면 도망간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으면 이 사람들이 이 시간을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고 그걸 누군가가 안 나서주면 내가 한다. 다른 누가 나서면 나도 그 분위기에 그냥 합류한다. 사실은 나설 생각도 없다. 근데 다만 내가 뭔 얘기를 했을 때 사람들이 웃어주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통쾌하다.
-언제부터 본인에게 코미디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나. =의도했던 건 아닌 것 같고 하다보니 이런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고, 여러 장르의 시나리오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설득시키고 매료시킬 수 있는 것들이 그런 영화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장르의 영화가 들어와서 나를 매료시켰다면 그걸 했겠지. 내 천성 자체가 즐거운 게 좋고 웃는 게 좋고, 해피엔딩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코미디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할 뿐이다. 리얼하게, 될 수 있으면 현실적으로. 그걸 보고 관객은 웃는 거다. 자신들의 일상의 경험이 거기 맞물려 있으니까. 코미디 연기는 미스터 빈, 짐 캐리, 이런 배우들이 하는 게 코미디 연기다. (눈 크게 부릅 뜨고 입 크게 벌려 캬악, 이들의 흉내를 내며) 내가 한번이라도 이러는 거 봤나? 나는 주인공 배역에 맞는 연기를 할 뿐이고, 웃긴 것은 그 역할이고 상황인 거다. 코미디라는 건 현실에서는 잘 없는 과장된 것이다. 현실을 과장해서 그 상황적 특징을 캐치하게 만드는 것.
-무슨 얘긴지 알겠다. =(앞의 답을 이어서) 승범이 역할을 예로 들면 후반부에서 갖은 웃긴 상황이 다 나오는데 그게 웃길 수 있는 건 앞에서 잡고 가줬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뢰를 밟았어, 그럼 바로 으악! 사람살려! 헉헉헉! 이럴 수는 없잖아. 갑자기 부도가 나갖고 하루아침에 망하게 됐어. 그러면 사람이 바로, 흑흑흑, 이러는 건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거다. 실제라면 어떨까. 아무것도 못해. 가만히 있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서 생각을 하게 되지. 대체 이게 뭐지? 이게 무슨 뜻이지? 류승범도 맨 처음에 그렇게 연기를 했기 때문에 그 뒤에 무엇을 했어도 그게 웃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리얼리티가 바탕이 됐기 때문에 그 뒤에 오버액션이 이어져도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거다. 그런 리듬과 현실에 바탕한 진정성이 필요하다는 거다. 잘못하면 후반부 장면들은 전부 붕 떠서 재미없어질 수도 있는 건데, 웃기면서도 저거 되게 고급스럽다 느껴질 수 있는 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나? 고급스러웠지? 솔직히 그 뒷부분은 한쪽으로 치우친 코미디이지만 그런 것들이 앞부분의 장면들이 없었으면, 웃겨도 마음은 안 가는 그런 코미디가 됐을 거다. 아 이번 영화에서 그건 코미디 연기였다. 아까 말한 그 계곡 장면에서 영탄이 선미 엿보는 거 들키기 전에 흐억, 하고 입벌리는 거. 이거. (시연) 이건 코미디 연기였네. (웃음)
-지금 찍고 있는 <색즉시공 시즌2>는 어떻게 하게 됐나. =돈 준다 그래서. (웃음) 3년 전부터 얘기가 있었고, 나는 직업이 배우이고 연기자이니 2편이라서 무조건 안 하고 그런 건 없다. 시나리오가 날 설득한 거지. 시나리오가 예술이야. 1편만큼 재미있고 슬프다. 거기에 절반의 익숙함과 절반의 새로움. 다른 인물들도 나올 테니까. 거기에 전편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이야. 그런데 왜 안 하나. 돈도 준다는데. (웃음)
-최근에 촬영을 마친 <스카우트>는 어떻게 하게 됐나. =그건 내가 시나리오를 두번 사양하고 세 번째에 오케이를 했는데.
-왜 사양을 했나. =날 설득하지 못했으니까. 근데 세 번째에 또 갖고 왔다. 그 시나리오가 날 울게 만들었다. 그 세 번째 시나리오는 내가 아니라 누가 해도 정말 잘될 거다. 시나리오가 너무 좋다. 김현석 감독은 천재야.
-김현석 감독과는 어떤 점에서 서로 잘 맞았다고 생각하나. =오, 그건 한두개가 아니다.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로 많다. 현석이 형하고 나하고, 한 사람이라고 여겨질 만큼 너무 생각이 똑같았다.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한다. 그러기 쉽지 않거든. 기본적으로 그 감독님의 생각은 이렇다. 영화를 관객이 편하게 봐야 한다는 개념이 있고 그게 김현석 감독으로서는 영화를 찍을 때 관객에게 갖춰야 할 예의라고 생각하는 거다. 매 장면에 힘을 주면, 매 장면의 조명, 카메라, 연기가 100점이 나오면 좋지, 좋지만 본인은 50점만 넘어도 오케이이고 만족이라 이거야. 우리가 어떤 영화를 찍을 때 매 순간의 이미지가 원본에서 카피되는 게 아닌 이상 그 장면은 그 자체로 오리지널리티를 갖기 때문에 그것이 50점인지 100점인지의 기준은 사실 없는 거잖아. 그렇게 쉽게 쉽게 가야 관객도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감독 입장에선 스탭, 연기자 아무도 귀찮게 안 한다. 오히려 스탭이나 연기자들이 감독한테 한번만 더 하면 안 될까요, 그런다. 그러면 감독은 모니터를 확인하고, 아니 괜찮다고,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어차피 이 장면을 쓸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웃음) 그러고나서 찍어보면 더 좋은 게 나와. 당연하지. 찍을 때 마음이 편하니까. 나도 그런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는데 감독이 그렇게 해주니까 좋았지. 정말 프로페셔널하다.
-최근에 ZED라는 신인가수 데뷔곡 <사랑의 숲에서 길을 잃다>에 피처링해주었던데. 간만에 마이크를 잡은 소감은. =<윤도현의 러브레터> 나가서 노랠 불렀는데 하나도 안 떨리더라고. 예전에 가수할 땐 무대 올라갈 때마다 만날 떨었는데 이제는 내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도 안 떨리더라.
-어떻게 피처링에 참여하게 됐나. =나랑 6년째 같이 살고 있는 친구다.
-결혼했지 않나. =우리 장모님하고 집사람이 못 나가게 했다. 너무 괜찮은 친구라서, 예뻐했다. 미국에서 와서 한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친군데, 달리 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 있어라 했다. (웃음)
-2005년 2월에 개봉했던 <파송송 계란탁> 관련 인터뷰 당시, 제작사 먼데이엔터테인먼트를 꾸리고 있었다. 2004년 8월에 개봉한 <시실리 2km>도 그곳에서 제작했다. 당시에 신작으로 멜로 제작 계획도 있었고 제작자로서의 포부가 있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2005년 6월 먼데이엔터테인먼트는 외주제작사 에이스미디어와 합병했다. 이후 회사의 행방은 어떻게 됐나. =망해서 없어졌다.
-<파송송 계란탁> 이후로? 그게 마지막이었나. =그렇다.
-제작자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서 날아갔지.
-그럼 그 꿈은 당분간 유보인가. =나는 연출의 꿈을 준비해야지, 내년이나 후년쯤. 지금까지 쓴 시나리오 중에서 골라서 할 거다. 일단 한편 해서, 흥행은 됐는데 영화적으로 별로다, 그러면 안 한다. 못하는 걸 왜 해? 잘하는 거 하고 살기도 바쁜데.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며) 나는 가늘고 길게 살 거다. (웃음) 나는 지금 열정만 있는 거지 내가 그 일을 잘할지는 나도 모른다. 꿈이 있으니까 일을 할 순 있는 거다. 그러나 내가 못한다, 재능이 없다, 그럼 왜 하나. 내가 잘하는 거 계속해야지. 나한테 이런 끼가 있다, 감독을 잘하는 것 같다, 그러면 그걸 살려서 열심히 해야겠지만.
-연출의 꿈은 언제 갖게 됐나. =오래됐지. 아주 옛날부터. 그래서 전공도 연출로 들어간 거잖아. (임창정은 중앙대 영화학과를 졸업했다)
-써놓은 시나리오들은 어떤 것들인지. =내가 먼저 할 영화는 휴먼드라마다. 코미디는 없고, 써놓은 것 중에 또 하나는 판타지물이고, 다른 또 하나는 대서사시다. 지금의 이 격동하는 사회를 반영한, 우리가 언제 변했는지 모르게 변해가는 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서사물. 제일 처음에 할 영화는, 성공한 한 남자가 느끼게 되는 가족애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랑, 제일 큰 그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사람을 떠나 보내야 하는 아쉬움. (제일 큰 사랑의 비밀을 알려주려는 듯) 엄마. 거기까지만. 더는 얘기 못해주겠어, 곧 할 거라서. 실화다.
-본인이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인터뷰하자고 한 특별한 까닭이 있나. =편하잖아. 사진 찍을 데도 많고. 밖에 내다보면 예쁘지 않나. 위층도 사진 찍기 좋다.
-가게는 잘되나. =망하지 않을 정도? 요즘 경기도 안 좋고,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래도 이 근처에서 제일 잘 된다.
-이천에서 하던 고깃집도 종목이 오리고기였나. =소고기였다.
-근데 왜 오리로 바꿨나. =이 오빠가 오리를 좋아하니까.
-이 말만큼은 그대로 쓰겠다. =써라.
-이번에 <만남의 광장> 기자시사 때 무대인사를 하면서 ‘이번에 둘째 애가 생겼습니다. 좀 도와주십쇼’라고 했다. 농담이겠거니 하면서도 문득, 육아의 책임이 본인에게 무게감을 주는구나 싶었다. =첫아들 준우는 아직 돌이 안 지났고 한명은 아직 뱃속에서 안 나왔다. 나는 이제 조금씩 느끼고 있지만 주위에서 듣는 형들의 얘기로는 그 부담감이 앞으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이고, 아이들이 더 예뻐질 것이라고 한다. 나한텐 그게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지만 막연하게 와닿긴 와닿는다. 그래서 내가 현장에 가 있는 게 좋다. 뭔가 하고 있으니까. 그전에는 현장 가 있는 게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뭔가 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내가 집에서 애랑 놀고 그럼 집에서도 좋아할 것 같지만 하루이틀이다. 얼굴만 뜯어먹고 살 거야? 사랑만 뜯어먹고 살 거야? 결혼과 아이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게 깨지는 순간 모든 것들도 다 뿔뿔이 흩어지는 거야. 현실, 그게 밑바탕이 돼야 한다. 물론 좀 적게 먹고 적게 쓰고도 행복할 순 있지만 아예 아무것도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행복은 돈인가? 그렇진 않지. 그건 자기가 느끼는 거다. 누가 나에게 행복하냐, 라고 물어봤을 때 그게 느껴지면 된다. 그리고 그건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나 이렇게 영화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걸 보여줄 수 있고, 내 아이들 있고, 남은 건… 건강이네. 병원 가서 피검사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대, 얼마나 행복해.
-시나리오를 읽고 분석한다고 했는데, 그 작업은 어떻게 하나. =처음에 한번 읽고,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그래프를 그린다. 세개. 하나는 스토리의 기승전결 그래프다. 두 번째는 나랑 제일 많이 붙는 상대배우, 보통 상대 여배우의 심리 상태를 그래프로 그린다. 그리고 내 그래프를 그린다. 앞서 두개의 그래프는 굉장히 굵직하고 투박하게 그린다. 근데 내 그래프는 음파의 파장 그래프처럼 아주 자세하게 그린다. 그 그래프를 그려놓으면 이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74번째 신이라 그러면 그 장면의 수위만 본다. 그럼 영락없다.
-언제부터 이 작업을 했나. =처음부터 했지. 음, 1987년부터. 연기학원 다니면서 배운 거다. 그 이후로는 시나리오를 정독해서 안 읽는다. 정독해서 내 대사가 외워질까봐. 외우면 상대방 대사만 외운다. 그리고 그 대사들을 촬영할 때 듣는다. 그러면 내 대사가 떠오른다.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 떠오른 나의 반응이다. 그게 오빠만의 방법이야. (귀여운 제스처로 고개를 갸웃하며) 오빠만의 방법? 그렇게 대사를 떠올리면 그 대사는 시나리오랑 거의 똑같다. 왜나하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심리상태도 그랬을 테니까. 거짓말을 하면 사람의 눈동자가 위로 향한다. 그건 본능이다. 근데 어떤 것들을 보면 연기에서도 그렇게 눈동자가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럼 그건 거짓말인 거지. 나의 말이 아니라 시나리오의 대사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다. 내가 정말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에 반응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의 눈을 보고 있겠지. 그래서 눈빛이 달라지는 거다. 연기는 거짓말로 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