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을 던졌건만, 바로 그 희생의 행위로 말미암아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는 최루성 여성멜로드라마의 고전적 줄거리다. <이리나 팜>도 주인공 매기(마리안느 페이스풀)를 유서 깊은 곤경에 몰아넣는다. 매기의 어린 손자 울리(코리 버크)는 난치병 환자. 런던의 의사는 소년을 치료할 의술이 있는 호주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통고한다. 하지만 이미 집도 담보로 잡힌 매기와 아들 내외는 비용 마련할 길이 막막하다. 매기는 홀로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홍등가 클럽 ‘섹시월드’에 호스티스로 취직한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들이미는 남자 손님들의 성기를 애무해 사정을 돕는 게 그녀의 업무. 수치심과 역겨움을 돈 모으는 보람으로 달래던 매기는 서서히 일에 적응한다. 그녀의 유달리 부드러운 손은 “죽여주는 오른손”으로 소문나 급기야 ‘이리나 팜’이란 예명이 수여된다. 사내들은 장사진을 이루고 매기의 오른팔은 이른바 ‘페니스 엘보’를 앓는다. 그러나 돈의 출처를 안 아들 톰은 노발대발하고 이웃은 멋대로 수군거린다.
<이리나 팜>은, 나이 지긋한 여인들이 지역 병원을 위해 누드 달력 모델로 나서는 영화 <캘린더 걸>과 통하는 바가 있다. 관습에 평생 순응하며 살아온 두 영화 속 여인들은 선한 목표를 위해 스캔들을 감수한다. 덧붙여 난생처음 겪는 체험을 통해 예기치 못한 생기를 얻는다. 매기의 경우 가파른 캐릭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의 노동은 매춘이라기보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용역에 가까워 보인다. 관객은 그녀가 ‘이리나 팜’이 되기 전에도 강인한 인간이었으며 이후에도 그러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사건은 매기의 강인함을 남들이 깨닫는 계기가 될 뿐이다. 신파와 유머, 여성 성장극을 뒤섞는 연출은 평이하고 때로는 모호하다. 마리안느 페이스풀은 기복없는 움직임과 표정으로, 평생 하소연하지 않으며 삶을 견뎌온 늙은 여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감정이 드러나는 대목은 길을 걷다가 불현듯 10대 패거리에게 담배를 빌리는 순간 정도다. 매기에게 사랑을 느끼는‘섹시 월드’의 사장 역은 에미르 쿠스투리차 영화의 단골 미키 마뇰로비치가 맡았다. 모든 소동이 잦아든 뒤 매기는 짐을 꾸려 한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는‘섹시월드’로 돌아간다. 그녀는 적어도 좀더 섹시한 여생을 누릴 거라고, <이리나 팜>은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