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 여자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술을 마셔서 취하죠?” 사람들이 가끔 내게 뜻밖의 질문을 한다. 1년여 전에 고등학교 교실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래서 금기와 억제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했지만 내 대답은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최근 한 잡지에서 유혹을 주제로 한 기사가 의뢰해왔을 때, 나는 다시금 그 질문에 몰두했고 자연스레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0년대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둔 <라 디스크렛트>(소심한 여자)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쳐다볼 때, 반밖에 못 봐요”라고 했다. 홍상수 감독의 주인공들은 술을 마심으로써 유혹을 허용하기에 너무 경직된 형식적 코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고 봤다. 나도 그들의 이미지의 반밖에는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알코올은 또한 매우 복잡한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술 마시는 장면에서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 중 하나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볼 수 있다. 남자 한명이 필사적으로 여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애쓴다. 그는 그녀에게 소주를 권하지만 그녀는 완강히 거절한다. 여자가 다른 사람의 잔을 받을 때 그는 당황하고 화를 낸다.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술이 아니라 담화인 것이다. 남자가 잔을 채우도록 놓아두고서, 그에게도 한잔을 따르고 여인은 제안을 교묘히 피하거나 미묘한 느낌을 전한다. 그러므로 술은 음료인 만큼 소통의 형식이기도 한 것이다.
남자가 술잔을 채우는 것은 어쩌면 술이 도덕적 경계를 허묾으로써 여자를 좀더 빨리 안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 텐데, 여자는 속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만큼이나 술의 효과와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있는 클레르 드니 감독은 언젠가 나에게 홍감독 작품에서 소주는 여자가 정신이 완전히 또렷한 상태에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협정과도 같다고 말했다. <생활의 발견>에서 한 커플이 꽤 취해서 모텔의 네온 아래 서로에게 기대어 서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마지막 한잔’을 하자고 권한다. 그녀는 간단하게 “지금부터 우리 거짓말은 더이상 말자”고 답한다. 이제부터는 더이상 술의 언어가 아니라 육체의 언어의 시간인 것이다. 실제로 결정은 여자가 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몸짓, 흐릿한 눈길과 같은 취했을 때의 에로티시즘이란 확실히 있다. 그래, 그녀는 취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취한 걸까? 술은 그녀가 술기운 때문에 그녀가 앞으로 줄 것과 자발적으로 주는 것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남자는 자기 옆에서 잠든 혹은 택시를 타고 떠나버린 여자의 깊은 욕망의 본질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술은 모호함의 장막이다. 다시 <생활의 발견>을 떠올린다. 경주에서 주인공은 열성으로 여자를 뒤쫓는데, 그녀는 그들이 이미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억난다고 한다. 그들은 재회의 술잔을 수도 없이 기울인다. 비틀거리며 식당을 나서며 그녀는 은근히 남자의 팔에 기댄다. 그들은 호텔로 가려고 택시를 잡는다. 그는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녀는 수컷의 서투른 조종에 속는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전적으로 알면서 옷을 벗는다(게다가 한편 나는 그녀가 이전의 만남을 꾸며냈다고 생각한다). 그의 팔을 잡았을 때, 어쩌면 그녀는 내비친 것보다 덜 취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간에 그를 가지고 노는 건 그녀이다. 결국 술 취한 한국 여자를 볼 때 우리는 단지 절반밖에는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