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1982)는 흥행에는 실패했다. 스필버그의 <E.T.>와 같은 시기에 개봉된 것이 이 사이버펑크 누아르 액션영화의 불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E.T.>가 아니었어도, 이 영화가 당시에 흥행에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영화가 시대를 너무 앞섰기 때문이다. 외려 개봉 이후에 주로 비디오를 통해 알려졌다고 한다. 영화의 질에 대한 대중의 인정이 뒤늦게 나타난 게 아닐까?
<블레이드 러너>는 포스트모던하다. 내용이나 구성만이 아니라, 대중과 전문가를 모두 만족시키는 “이중코드”(찰스 젠크스) 역시 포스트모던한 전략이다. 대중은 대중대로 이 영화를 누아르 액션으로 즐길 것이고, 전문가는 전문가대로 영화의 바탕에 깔린 철학적 담론의 풍성함에 환호할 것이다. 열광은 인문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영국의 과학자들 역시 이 영화를 20세기 최고의 SF로 꼽았다고 한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다의적이어서 크게 세 가지 상이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첫째, 근대 합리주의를 전복하려는 료타르, 보드리야르 같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인문학적 담론. 둘째, 이른바 ‘혼성모방’과 같은 미국 대중문화의 미학적 전략. 그리고 셋째, 모더니즘 건축을 극복하기 위해 60년대 이후에 일어난 새로운 담론과 실천. <블레이드 러너>는 이 세 가지 의미에서 모두 포스트모던하다고 할 수 있다.
시간적 분열증
여기저기에 악마의 혓바닥처럼 발전소의 화염이 날름거린다. 건축의 양식도 다양하다. 마천루는 어딘지 고딕성당의 첨탑을 닮았고, 데커드가 사는 아파트는 아즈텍의 신전을 닮았고, 타이렐사에서 내다보는 전망은 사막에서 바라보는 피라미드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도시의 건물에는 그리스-로마 양식의 기둥이 박혀 있고, 타이렐사 건물의 내부는 이집트 신전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한마디로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는 포스트모던하다.
“새로운 것이 항상 더 좋다.” 모던의 건축은 이 신조에 따라 과거의 건축언어로 돌아가는 것을 금한다. 철근, 유리, 콘크리트로 된 매끈한 기하학적 구축물. 이것이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건축이다. 포스트모던은 이와 달라서 과거의 낡은 건축언어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가령 최첨단 건물에 그리스 신전의 박공을 박아넣거나, 서구식 건축에 동양적 모티브를 가미하는 상호문화성은 포스트모던 건축의 일상이다.
<블레이드 러너> 속의 로스앤젤레스는 미래와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다.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미래주의적 건축이 있는가 하면, 중국의 재래시장 같은 뒷골목도 있고, 산업사회의 쓰레기 더미도 있다. 과거와 미래의 건축언어를 섞어놓는 절충주의. 건물만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입은 패션 역시 미래주의에서 네오 바로크까지 다양하기 짝이 없다.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대로 “<블레이드 러너> 속의 건축은 울트라모던하지 않고 포스트모던하다.”
공간적 혼성모방
모더니즘은 순수함을 위해 이질성을 제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수함을 포기하고 이질성을 끌어안는다. 모더니즘이 배제적(exclusive)이라면, 포스트모던은 포괄적(inclusive)이다. 그리하여 영화 속의 LA는 정체성(identity)이 없다. 마천루의 숲은 뉴욕을 닮았고, 뒷골목의 용 모양의 네온등은 홍콩을 연상시키고, 도시의 전광판은 사미센의 음악과 더불어 도쿄의 가부키초를 드나드는 일본 게이샤의 얼굴을 비춘다.
시드 미드의 세트디자인은 혼성모방으로 가득 차 있다. LA의 마천루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데커드가 사는 아파트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에니스 하우스, 베바스찬이 사는 버려진 건물은 LA의 랜드마크 브래드베리 빌딩의 모방이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건물들의 혼성모방을 통해 이 지구 위의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다. 푸도프킨이라면 이를 아마도 ‘창조적 지리학’이라 불렀을 것이다.
주민들도 마찬가지. 포장마차 식당의 영감은 일본어를 말하고, 주인공을 잡으러온 요원들은 스페인어(?)를 말하고, 안구를 만드는 과학자는 중국어를 말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은 난데없이 독일어를 말한다. 2019년 LA는 바벨의 도시다.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미국사회 자체가 포스트모던하다. 미국은 건국과정 자체가 유럽 여러 나라의 혼성모방이었다. 그런 나라가 포스트모던 대중문화의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원본과 복제
베냐민은 사진과 영화와 같은 새로운 복제기술이 어떤 면에서 원본의 지각을 능가한다고 말했다. 2019년에 복제의 대상은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 인간 자신이다. 타이렐사에서 제작한 리플리컨트들은 원본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극단적 환경에서 인간이 하기 힘든 일을 수행하도록 디자인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끓는 물에 손을 담가 삶은 달걀을 꺼내는가 하면 한손으로 사람을 들어올리기도 한다.
베냐민은 원작은 “지속성”을 갖는 반면 복제는 “일시성”을 가질 뿐이라고 말했다. 인간 역시 복제되면 그저 일시성을 가질 뿐. 그리하여 리플리컨트들의 수명 역시 4년으로 제한된다. 성인으로 탄생했기에 그들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없다. 외모에는 차이가 없기에 유년 시절의 기억의 유무가 구별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 리플리컨트들은 기억의 빈 부분을 조작된 사진으로 채워넣으려 한다. 영화 <메멘토>의 발상은 혹시 여기서 나왔을까?
복제는 처음엔 어설프게 원본을 흉내내다가 마침내 원본과 구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다. 타이렐사의 차세대 복제인간 레이철은 다른 리플리컨트와 달리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 믿는다. 그녀의 머리에는 유년기의 기억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복제된 것이기에 사밀(私密)하지 않다. 자신을 찾아와 엄마와 찍은 사진을 들이대는 레이철에게 데커드가 잔혹하게 잘라 말한다. “여섯살 때를 기억해? 남동생이랑 지하창문을 통해 빈집으로 들어갔었지? 의사 놀이 하러. 당신 차례가 왔을 때 당신은 도망쳤지. 기억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지? 이식된 거야. 당신의 추억이 아니라 회장 조카의 기억이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원본과 복제의 구별이 사라지고, 복제가 아예 원본을 대체해버린 세계.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세계다. 2019년의 LA에서 거의 모든 동물은 이미 복제로 대체된 상태. 복제인간의 수명이 짧은 것은 ‘안전장치’로 설정되지만, 나중에 복제 양 돌리가 증명하듯이 그것은 기술적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이철에 이르러 이 한계는 극복된다. 레이철의 기억은 단절되어 있지 않고, 그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지 않다.
이쯤 되면 복제와 인간의 차이는 사라진다. 리플리컨트만 단명한 게 아니다. 복제생물의 디자이너 세바스찬 역시 신체가 빨리 늙는 조로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레이철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려던 데커드는 바닥에서 오리가미 유니콘을 발견한다. 가프가 레이철을 제거하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유니콘은 데커드가 꿈에서 봤던 것. 이로써 영화는 데커드마저 리플리컨트라고 암시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타이렐사의 모토다.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는 데커드와 레이철. 하지만 둘 다 리플리컨트라면, 진짜와 가짜의 구별은 무색해지고, 복제가 세상에 존재할 권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저 복제라는 이유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를 죽이는 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영화 속 인간들이 말하듯이 ‘폐기한다’(retire)고 해야 할까? 아니면 ‘처형한다’(execute)고 해야 할까?
로이는 높은 건물의 철제 빔에 매달린 데커드에게 말한다. “공포 속에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노예의 기분이야.” 리플리컨트도 인간과 똑같이 자유를 갈구한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욕구 때문이다. 휴머니티는 그들에게도 있다. 로이는 애인인 프리스를 죽인 데커드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에게 자기 얘기를 들려주며 죽어간다. “그 기억이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말이야.”
포스트모던
공간은 미래와 과거의 분열증적 결합으로 구축되고, 세트는 여러 시대와 문명에서 인용한 혼성모방으로 구성되며, 플롯은 가상/실재 구별의 사라짐을 말하는 후기구조주의의 담론으로 조직되어 있다. 인문학적 담론, 대중문화의 전략, 건축의 양식이라는 세 가지 의미 모두에서 <블레이드 러너>는 포스트모던하다. 이런 영화가 1982년에 나왔다. 흥행의 실패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