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온다 리쿠 지음/ 비채 펴냄
책을 덮자 순간 주변의 온도가 낮아진 것 같다. 후텁지근했던 장마가 끝난 뒤 숨막히는 더위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그렇다.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는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인데, 책의 분위기는 추리물보다는 미스터리한 환상소설 정도로 에둘러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유지니아>를 구성하는 퍼즐 조각들은 마치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그 모습을 바꾸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끼워맞춰서는 커다란 그림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서들이 들어맞지 않는 데서 오는 다소간의 불안, 빈틈처럼 보이는 곳에 들어찬 상념들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주변의 온도를 낮춘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데서부터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을 듣는 사람인지 궁금해하면서 책장을 넘기다보면 20년 전 살인사건의 이야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호쿠라쿠 지방의 K시에서 어느 날 대규모 독살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지역에서 명망있는 집안인 아오사와가의 일족과 친척, 이웃 사람들까지 모두 열일곱명에 달했다. 아오사와가의 생존자는 단 한명. 사건 내내 집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는 소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있었을 아오사와가의 손녀 히사코였다. 다만 히사코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게 문제. 몇달이 지나 한 남자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밝히며 자살한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아오사와가 이웃에 살던 소녀가 독살사건을 다시 취재해 소설로 발표했는데, 또다시 10여년이 흘러 누군가가 이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있다. 사건의 진범은 누구인가? 그리고 범행 현장에 있던 시에 적힌 ‘유지니아’는 무엇인가, 혹은 누구, 혹은 어디인가?
<유지니아>는 불친절하다. 독자가 열심히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금 누가 이야기를 하는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열심히 생각한다고 진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밌는 건, <유지니아>를 읽는 즐거움이 바로 그 어긋남에 있다는 사실이다. 수수께끼 해결이 완료되는 순간의 손에 잡힐 듯한 명료한 즐거움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모호함 저편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자체가 즐겁다고 할까. 사람이 한명 한명 등장할 때마다 사건의 진상은 점점 흐릿해지는데 그 흐릿함이 한계에 다다르는 것 같은 순간 새로운 그림이 보인다. 온다 리쿠 세계의 결정판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노련함이다. 온다 리쿠는 인터뷰를 통해 <유지니아>에서 “경계선상의 이야기, 불안감이 내내 가시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이토록 불안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해답을 얻기 위해 첫 페이지부터 다시 한번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미궁에 빠져도 그 오싹한 기분에 오히려 즐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