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희(조안)는 자신의 창작품을 실재에서 구한다. 절친한 친구가 외국으로 나가버린 사이, 그 친구를 둘러싸고 떠도는 나쁜 소문을 뼈대로 소설을 썼고, 인기를 얻었다.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창작의 희생양이 된 친구의 실재는 부정할 수 없다. 후속작이 문제다. 편집장은 그럴듯한 글의 마감을 쪼고 있는데 창작의 불을 지펴줄 자극적인 소재가 없다. 마침, 베트남으로 간 친구 서연(차예련)이 보내온 ‘므이의 전설’이 구미를 자극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꿈꾸는 자는 므이 초상화에 저주를 빌면 대신 복수를 해준다, 거기에는 끔찍한 대가가 뒤따른다….’
윤희는 베트남으로 날아가 옛 친구 서연의 집에 머물며 그의 도움을 받아 므이 초상화의 기원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윤희는 므이의 초상화에 대해 알게 되면 될수록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서연에게서 석연치 않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서연은 윤희가 자기를 먹이삼아 소설을 썼다는 것도 알고 있던 터였다. 서연의 친절한 미소는 지금 친구라는 뜻일까, 준비된 그 무엇의 효과를 기대하는 쾌감일까.
므이의 초상화가 지닌 마력이 과거에 봉인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야기의 출발이니 비밀이랄 것도 없다. 공포의 비밀은 과거형의 초상화가 어떻게 현재에서 힘을 발휘하느냐에 있다. 초상화에 왜 저주가 깃들게 됐는지 기원을 풀어내는 동시에 그 현재성을 보여주는 건 시간의 매듭과 관련한 사안이다. 그렇지만 이건 베트남을 주 무대로 선택한 영화의 온전한 과제가 아니다. ‘왜 베트남인가’라는 공간적 공포를 생산해내야 한다.
<알포인트>의 탁월함은 베트남이어야만 가능한 공포를 특정의 역사와 이국의 공간 사이에서 요령껏 풀어낸 데 있다. <므이>의 공간은 단지 뒤틀려 있을 뿐이다. 한은 한국에서 시작됐고, 그 매듭도 한국에서 풀어낸다. 베트남은 한풀이 도구를 제공하는 소재 이상이 아니다. 원혼을 만들어내는 한맺힌 사연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 맥락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반드시 베트남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베트남이라는 공간을 기계적으로 가져온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기계적인 한맺힘이다. 베트남 도심과 자연에 캐릭터를 세우고 풍광을 잡아낸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미스터리에 가까운 선택이다. 공포의 창조성에 조력하는 건 차예련의 알쏭달쏭한 미소와 미스터리한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