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창비 펴냄
물난리에 물자난에 초토화된 90년대 북녘 이야기가 해외뉴스로 들려오는 아프리카의 슬픈 풍경처럼 느껴진다, 고 해도 누굴 탓하랴. “개새끼들.” 북한 소녀 바리의 아버지가 험한 일을 당하고 내뱉는 유일한 욕설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소설 안에서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세상에는 크고 작은 개새끼들이 너무 많다는 걸 소설은 국제적으로 체험케 해준다. ‘개새끼들’이 빚어내는 비극의 향연을 당장 중지할 방도는 없어 보인다. 외과수술로는 어림없는 그 상처들을 어루만져주고 싶어 영혼의 씻김을 끌어들인 걸 체념의 제의라고 시비걸 여지 역시 없어 보인다. 바리와 그의 할머니에게 영혼을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을 준 건 판타지스럽지만, 겪지 않은 비극의 풍경도 멀찍이 선 자에겐 일종의 판타지일뿐이다. 바리가 하필 식량난에 줄줄이 죽어나가는 북녘의 소녀이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잘살아보겠다고 영국으로 목숨 건 밀항을 떠나는 중국인들이 있고 그 틈에 바리가 끼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런던에서 하필 이슬람 청년에게 눈길이 가고, 그때 하필 9·11이 터지며 결혼한 이슬람 청년의 동생이 어떤 사명감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성전’에 뛰어드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마이클 윈터보텀이 다큐 같은 픽션으로 그려낸 것처럼, 바리의 남편이 동생을 찾아 파키스탄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된 뒤 하필 쿠바의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갇혀지내게 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황석영의 입담은 예나 지금이나 저 밑바닥 중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숱한 난장을 지켜본 뒤 걸쭉하게 엑기스를 뽑아낸다. <장길산>이 그랬듯 전통설화 바리데기 공주를 빗댄 슬픈 서사가 구불구불 인생역정처럼 토해지는데 지루할 틈없는 운율을 타고 내리는 토사물이 어느덧 거대한 성을 만들어버린다. 그 성에 올라서면 소설은 단순히 소설이기를 멈춘다. 북한을 오래 체험하고 온 소설가는 생지옥이었던 북한의 한때를 안타깝게, 그러나 냉정하게 토해낸다. 어린 바리의 1인칭 시점이지만 어떤 르포르타주가 이만큼 강력할까. 중국에서 영국으로 밀항하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 갇혀 당하는 강간의 현장은 수모를 넘어선 치떨림이다. 어린 바리가 목격하고 겪으며 쌓아가는 소수자의 연대는 그래서 더할 나위없이 강력하고 생생한 연대의 선전선동이다. <바리데기>는 황석영의 세계화 프로젝트 같지만 ‘개새끼들’의 글로벌라이제이션과는 정반대에 서서 세계 인민을 위무한다. 절망하는 바리에게 죽은 할머니가 들려준다. “애쓰지 말라. 세상에 간직한 네 몸은 네가 아니야. 네 넋에 집이지. 몸을 버리구 떠나오문 너두 우리처럼 된다. 슬픈 거나 기쁜 거나 다아 세상에 속해 있지.” 황석영이 곧 바리이자 바리를 안내하는 할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