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누군가가 물었다. “메가박스가 홍콩에 팔린다면서.” 메가박스쪽에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다시 물었다. “호주에 팔린다던데.” 다시 확인했더니 그런 말 들은 적 없다고 했다. 얼마 뒤, 누군가가 또다시 물었다. “메가박스쪽에 구매의사를 표한 곳이 다국적 펀드라고 하던데.” 이번엔 안 물어봤다. 그저 돌고 도는 소문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다음엔 또 어디에서 산다는 말이 나올까. 잠깐 궁금하긴 했지만 그냥 참았다. 이번주 초 한 제작사 개업식에 들렀다 한 영화인이 메가박스 이야길 꺼냈다. 그래서 한마디 해줬다. “팔긴, 뭘 팔아.” 그러던 중 뒤통수 맞았다. “거 봐. 판 것 맞잖아!”
설왕설래, 메가박스 매각이 사실로 판명됐다. 멀티플렉스 체인인 메가박스의 소유권이 코리아 멀티플렉스 인베스트먼트 코퍼레이션(KMIC)이라는 투자회사에 넘어간 것이다. KMIC는 “자산운용액이 1조달러에 달하는” 호주의 금융 선두주자이자 “55%의 수익을 해외에서 거둬들이는” 글로벌 은행 매쿼리가 설립한 신생법인. 미디어플렉스는 7월18일 공시를 통해 메가박스 보유 주식 전량인 293만754주(지분 53.9%)를 KMIC에 넘겼다고 밝혔다. 매각대금은 1456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디어플렉스는 또 2년 동안 메가박스 경영 및 운영에 대한 자문 계약을 체결했다고 덧붙였다. 미디어플렉스는 이에 따라 수수료 100억원과 인센티브 300억원을 받게 된다. 관계자에 따르면, 경영 및 운영에 대한 자문 계약은 최대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2대주주였던 영국계 투자회사 핀 벤처스도 소유 주식을 모두 넘겨, KMIC는 메가박스의 지분 100%를 보유하게 됐다.
오리온, 영화판에서 철수하나
공시 이틀 전 이사회를 통해 자회사 메가박스를 매각하기로 결정한 미디어플렉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매각으로 “핵심 역량인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고 동시에 콘텐츠와 연계한 파이낸싱 및 개발 프로젝트 등 사업영역 확대를 통해 성장 모멘텀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미디어플렉스의 고위 관계자는 “글로벌 콘텐츠 개발 등에 들어갈 투자 재원을 확보하고 동시에 극장 경영 및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이번 계약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몸집은 줄이고, 실탄을 늘리고, 기동성을 확보해 본격적으로 해외시장을 두드리겠다는 뜻이다. 미디어플렉스쪽은 자력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려면 위험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이십세기 폭스와의 업무 제휴한 것과 마찬가지로 메가박스 매각 또한 풍부한 “자금력, 사업 노하우, 네트워크를 지닌 글로벌 업체들과의 파트너십을 맺는” 목적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미디어플렉스쪽의 설명과 달리 영화계 일각에서는 오리온이 영화사업을 접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7월18일 공시가 나온 뒤 쏟아진 기사들을 보면, 메가박스 매각은 영화사업 철수를 위한 첫 번째 단계라는 지적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지난해 말부터 오리온그룹이 온미디어-쇼박스-메가박스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문 전체를 묶어서 매각하려고 나섰으며, 거대 이동통신회사들을 포함한 상대들과 매각 금액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영화계 안팎의 풍문과 연관되어 있다. 올해 들어 한국영화에 대한 신규 투자를 꺼리는 등 지나친 숨고르기 때문에 오리온이 충무로를 떠난다는 소문은 최근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임필성 감독의 <헨젤과 그레텔>의 투자·배급권이 CJ엔터테인먼트에 넘어가는 사태까지 겹치면서 더욱 불거졌다. 이번에 메가박스를 사들인 KMIC 또한 영화사업을 펼치고 있는 곳이 아닌 펀드 중심의 금융자본이라는 점도 오리온의 영화사업 철수설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플렉스쪽은 메가박스 매각-영화사업 철수와 관련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다. 미디어플렉스의 고위 관계자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다 안다. 한꺼번에 다 팔아야 가치가 더 올라가는데 왜 극장만 떼서 팔겠나. 거듭 말하지만 이번 극장사업 매각은 영화사업, 특히 콘텐츠 재투자를 위한 것이다. KMIC 또한 좀더 적극적인 극장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애초 더 높은 가격을 부른 곳이 있었다. 그럼에도 KMIC를 택한 것은 미디어 관련 사업에 뜻이 있는 회사이고 장기적인 제휴가 가능한 파트너였기 때문”이라면서 “6월에 300억원 규모의 2개 펀드를 새로 결성해 투자할 프로젝트를 찾고 있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에 대한 투자 결정은 거의 막바지 검토 중이다. 극장사업 또한 중국쪽에 더 많은 멀티플렉스를 세울 계획이다”라고 덧붙였다. 참고로 KMIC는 메가박스를 사들이기 전에 한 종합유선방송사업자 인수전에도 뛰어들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메가박스 매각이 의미하는 것
미디어플렉스쪽이 KMIC가 사들인 메가박스 지분을 향후 10년 동안 되팔지 못한다는 세부 계약 내용을 밝히면서 얼마 되지 않아 메가박스의 전주가 이동통신회사로 바뀔 것이라는 가설은 점점 힘을 잃고 있는 상황이다. 메가박스의 한 관계자는 “운영 및 경영 관련 계약 내부에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면서 “결국 이번 메가박스 매각 등으로 얻은 자금은 콘텐츠와 신규 사업에 투여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메가박스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크게 보면 테마파크 사업처럼 영화 연계사업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공시에서 밝혔듯이, 미디어플렉스는 오리온이 소유한 용산, 도곡동 부지 개발을 통해 콘텐츠의 활용도를 최대한 높이는 관련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
위기는 선두업체가 맨 먼저 감지하는 법이지만, 탈출구 모색은 후발주자가 더 절실하다. “이번 매각에 대해 지나치게 크게 반응하는 것 같다”는 한 극장 관계자는 “지난해 1091억원의 매출과 87억4084만원의 순이익을 거둔 알짜기업 메가박스를 왜 팔았을까”라는 질문에 “사실 간단한 문제”라고 답했다. “여름에 들어서 조금 호전되긴 했지만 상반기 극장 매출이 전년도에 비해 20% 가까이 줄었다. 게다가 향후 1, 2년 동안 CGV와 롯데시네마가 극장 수를 더 늘리는 상황에서 수익률이 호전되기를 기대할 순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후 SKT와 KT가 극장사업에 뛰어들 것을 감안하면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때 빨리 파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그는 반문했다. 극장사업의 수익성에 대한 비관 및 구조조정에 대한 필요성은 멀티플렉스 체인 3사가 모두 느끼고 있었지만, 극장업계 3위인 메가박스가 맨 먼저 파트너를 구하거나 매각을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는 것이다.
메가박스가 외국자본에 넘어갔느냐는 사실이나 오리온이 영화사업을 철수하느냐 마느냐는 추정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이번 거래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점이다. 한 투자자는 미디어플렉스의 메가박스 매각이 “그동안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키를 쥐고 있었던 영화가 주도권을 방송 등에 완전히 뺏겼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앞으로 영화산업은 방송을 중심으로 한 영상산업이라는 큰 틀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구조조정의 국면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IPTV를 비롯한 컨버전스 환경이 아직 산업적으로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분간 영화가 킬러 콘텐츠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맡겠지만, 자본은 영화보다는 방송쪽에 관심의 방점을 찍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는 “미디어플렉스의 영화쪽 투자는 메이저 자본의 자체 제작 프로젝트와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집중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영상산업의 밑그림을 읽어라
CJ와 롯데라고 이 같은 움직임과 무관한 길을 갈 것인가. 어쩌면 미디어플렉스의 메가박스 매각은 극장 자본을 바탕으로 한 대기업들이 영화사업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인업을 확보하기 위해 전투를 치르던 극장 자본들은 수익률은 물론이고 시장점유율마저 최저를 기록한 2007년의 위기 앞에서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청사진을 내놓을지 아니면 등을 돌릴지 섣불리 단정할 순 없으나 그 어느 쪽이든 새로 만들어질 자본의 지형도 안에서 충무로가 최대 수혜자가 될 것 같진 않다. 그런 점에서 충무로가 살 길은 앞으로 그려질 영화산업이 아닌 영상산업의 밑그림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내 연관 고리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