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_ “내가 이렇게 <다이 하드> 시리즈에 정을 느끼고 있었나, 이상했어요” VS. 이동진_ “해커인 매트라는 캐릭터는 맥클레인과 최적의 버디 무비적 조합을 이뤘더군요.”
여름에 먹는 다이하드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셤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셤님의 말(이하 셤): 들왔어요. ^.~ (귀여운 척. -.-)
여름에 먹는 다이하드님의 말(이하 여름): 어서 오세요. ^^ 대화명이…?
셤: 수염의 준말입니다. 어제 늦게 자고 나서 오늘 못 깎았더니 종일 찝찝하네요.
여름: -..- <다이하드4.0> 이야기를 꺼내려니 <다이하드3>의 사진을 <씨네21> 창간한 해에 표지로 썼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제8호였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야 다음편이 나왔군요.
셤: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씨네21>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네요. ^ 겨우 시리즈 속편 하나가 나올 정도의 시간이었다니. ^^ 그런데 바로 그 세월의 간격이 제가 <다이하드4.0>에 별로 기대하지 않은 한 이유였어요. 제대로 굴러가는 시리즈라면, 98년이나 99년쯤에 4편이 나왔어야지 12년 만에 속편이 나올 리가 없다고 본 거죠.
여름: 이도저도 안 되니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볼까 하는 고육지책이 아니냐는 거죠? 사실 렌 와이즈먼 감독의 전작 <언더월드> 1, 2편도 그렇게 기대치를 높일 근거는 못됐죠.
셤: 네. 평범한 오락영화였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무척 놀랐어요.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다이하드4>가 아니라 <다이하드4.0> 이란 제목을 붙일 만하다는 거였어요. 그건 일종의 업그레이드의 의미일 테니까요.
여름: 동의해요. 시대에도 맞고 나이 들어가는 영웅 맥클레인의 면모와도 잘 어울리는 적절한 업그레이드였어요. ^_^
셤: 지난해 <미션 임파서블3>를 보고 나서와 매우 흡사한 느낌의 만족도였습니다. 그 영화나 이 영화 모두 더이상 나올 게 없을 것 같은 시리즈에서 그리 많지 않은 경력을 가진 감독이 새로 참여해서 놀라운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완성도로 즐거움을 준 경우라는 점에서 흡사하죠.
여름: 저 역시 영화가 끝나자 옆사람과 ‘하이파이브’라도 해야 할 것 같은 흥겨운 기분이었는데요. 렌 와이즈먼 감독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기여일까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 영화는 특히 시나리오 크레딧이 복잡해요. 원안, 스토리, 몇몇 캐릭터의 창안자가 다 다르죠. 액션에서는 스턴트와 공간 활용이 발군이라 그 부문 스탭들의 공헌이 커 보였습니다.
셤: <언더월드>도 나름의 미덕은 있는 영화였어요. ^^ 전 이번 <다이하드4.0>에서 액션의 상상력이 놀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이젠 블록버스터에서 중요한 게 표현력보다는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선하게 상상하느냐가 관건이지 그걸 표현하는 능력은 덜 중요해진 것 같다는 거죠.
여름: 음, 표현력은 어느 정도 산업 전체가 공유하는 면이 있겠지요. <다이하드4.0>은 존 맥클레인을 다시 불러내는 데에 있어서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먼저 상상했을 텐데요. 시리즈와 캐릭터의 딜레마 자체를 소재로 끌어들인 점이 주효했어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사회를 움직이는 시대에 바로 그 신호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이 투박한 액션영웅이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걸 그리는 과정에서 우리 시대가 조직되어 있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그것이 어이없이 교란될 수 있다는 점을 주시하고 있어요.
셤: 그와 관련해 이 시리즈가 예전에도 일종의 버디무비 형식을 띠고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그런 요소가 강하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거예요. 일단 존 맥클레인은 기계치에 컴맹인데 상대가 하이테크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이니 그에 상응할 보조 캐릭터가 필요하죠.
여름: 이번의 보조 캐릭터는 역할이 질적으로 다르죠.
셤: 저스틴 롱이 연기한 매트 패럴이라는 캐릭터는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맥클레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해요. 흔히 그런 떠벌이 배역은 흑인 배우가 맡게 마련인데 저스틴 롱이 그 역할을 해내서 신선하다는 느낌까지 있었고요. 신세대와 구세대, 디지털과 아날로그, 머리와 주먹, 수다와 과묵을 각각 대표하면서 최적의 버디무비적 조합을 이뤘다고 봅니다.
여름: 존 맥클레인도 젊어서는 한 말발 했다고요. ^.~ 이 조합은 맥클레인에게 향수를 느끼는 세대와 그를 잘 모르는 어린 세대가 각기 동일시할 대상을 제공하는 점도 있죠.
셤: 그렇죠. 브루스 윌리스가 벌써 52살이니까요.
여름: 그런데 이야기를 같이 끌어가는 기본적 기능 외에도 두 사람의 취향 차이에서 나오는 코미디가 재미있었어요. 패럴의 방에 있는 고가의 프라모델을 맥클레인이 ‘인형’으로 총칭한다거나, <스타워즈> 보바 펫 모형 앞에서 “난 이것보다는 <스타워즈> 취향이라서”랬다가 들통나고. ^^ 이건 뭐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아직…”이라는 식이죠.
셤: 매트가 통신망이 두절된 상황에서 PDA를 옛 통신위성에 접속해서 쓸 때
존 맥클레인이 이거 어떻게 한 거냐고 놀라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존이 터진 에어백을 무지막지하게 손으로 뜯어내자 매트가 탄성을 지르면서 “어떻게 한 거예요?”라고 하는 장면도 그 대구 유머가 무척 재밌더군요.
여름: 둘이 계속 서로 감탄하는 거죠. ^0^ 천생연분이라니까요.
셤: 70년대를 매트가 ‘마이클 잭슨이 흑인이었던 시절’로 표현하는 것도 고급 유머. ^^
여름: 매트가 라디오로 뉴스를 왜 듣냐며 방송은 필요없는 물건의 소비 욕구를 조장하는 재벌 언론의 음모일 뿐이라고 일축하잖아요. 세상을 책과 이론으로 깔끔히 정리하는 전형적인 요즘 똑똑한 아이들의 면모죠. 반면 존 맥클레인은 무능한 공권력을 겪을 만큼 겪어놓고 또 국가 인프라가 디지털 테러로 마비되는 비상사태가 오니까 “정부에 방책이 준비되어 있겠지” 하고 순진한 믿음을 내비치더군요. 그 점이 두 사람의 세상 보는 눈의 결정적 차이이며 둘이 서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구나 싶었어요.
셤: 전 이 영화의 대사들이 상당히 재치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스토리의 성격상 어차피 영웅 타령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장 덜 닭살스럽게 영웅 타령을 한다는 거죠. 그것도 상당히 설득력있게. “아무도 안 하고 누군가 해야 하니까 내가 하는 것”이라고 맥클레인이 말할 때 “그러니까 당신이 영웅인 거예요”라고 매트가 말하잖아요.
여름: 둘이 하도 잘 어울리다보니 혹시 5편이 제작되면 사위와 장인의 버디무비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_-# 영화 말미에 맥클레인의 딸 루시와 매트가 살짝 통했잖아요? 그런데 사실 영화 도입부에 루시에게 집적대던 남자가 맥클레인에게 된통 당하는 장면을 보면 여자친구의 아빠가 존 맥클레인이라는 건 제4자가 봐도 참으로 딱한 일이죠.
셤: <미트 더 다이하드 페어런츠>, 뭐 이런 제목으로다가. ^^
여름: 아니, <돈 미트 더 페어런츠>가 낫겠어요. ^^
셤: 전 사실 브루스 윌리스가 좀 비호감인데 존 맥클레인은 호감이에요, 참 이상하죠? 브루스 윌리스의 가장 강력한 캐릭터가 존 맥클레인인데 말이에요.
여름: 브루스 윌리스는 어떤 영화에 나올 때는 거의 졸고 있거나 한잔하고 아무 생각없이 남의 촬영장 구경 온 것처럼 보일 때도 있거든요. 일례로 <오션스 트웰브>에 나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_-# 그런데 <식스 센스>나 <다이하드>나 <펄프 픽션>을 보면 눈빛이 다르거든요.
셤: 맞아요. 이거다 싶을 때 올인하는 스타일의 배우인 것 같아요. 그게 그의 오랜 경력을 가능하게 해온 거죠. 하긴 우리가 존 맥클레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어떻게 ‘기계치 컴맹 히어로’를 안 좋아할 수 있겠어요. ^^;
여름: 영화로서 1편도 좋아했지만 4편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다이하드> 시리즈에 정을 느끼고 있었던가’ 이상했어요. 갑자기 늙어버린 기분이었어요. ‘이것 봐, 역시 진짜 스턴트가 최고야. 이런 게 진짜 재밌는 영화지!’ 하면서 괜히 으쓱해지는 그 느낌은 뭐란 말입니까. T-T <다이하드> 1, 2편은 돌아보면 당시 허황된 액션의 대명사로 통했는데, 이제 매우 현실적인 액션영화로 보이니 격세지감입니다.
셤: 뭐, 우리가 늙었다는 거죠. 매트가 아닌 존 맥클레인에게 투사를 하고 있으니…. -.- 그 사이에 할리우드 주류 블록버스터의 색깔이 달라진 탓도 있을 거예요. 요즘은 이른바 정통 액션영화들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 영화는 80년대 후반이 절정기였죠. <람보>와 <록키>에서 <마지막 보이스카웃>과 <다이하드>까지 말입니다.
여름: 80년대 남성 액션영웅의 영화들은 레이건 시대 마초이즘의 발현이라고 본 평자도 있고, 반대로 내적인 남성성 위기에서 비롯된 방어기제라고 해석한 학자들도 있었죠. 이제는 오히려 여성 캐릭터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신선해(?) 보일 정도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 규범화했지만요. <다이하드4.0>에도 나오죠.
셤: <뜨거운 녀석들>에서는 노인들에게 드롭킥을 날리고 <다이하드4.0>에서 여자 테러리스트와 무지막지하게 주먹질을 하고, 뭐,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편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고, 기분 묘하더라고요.
여름: 말씀드린 대로 <다이하드> 시리즈의 기원이 있으니, 여성묘사가 제한되는 건 불가피하죠. 그런데 영화에 있는 그대로보다 번역 과정에서 과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 마이(매기 큐)와 싸우는 도중 맥클레인이 “자 심호흡해” 하고 경고하는 대사를 “자 예쁘게 웃어봐” 식으로 바꾸는 건 불필요했던 것 같아요.
셤: 저는 이 영화에 9·11 이후의 미국의 신경증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고 봤어요. 의사당이 테러로 폭파되는 모습이 생중계되는 것을 보고 모두들 망연자실하는 광경이 나오잖아요? 그럴 때 미국인들이 실제 느꼈던 집단적 트라우마가 손에 잡힐 듯했죠. 아마 미국 관객은 그 장면을 훨씬 더 절절하게 봤을 거예요.
여름: 그런데 그게 조작된 이미지잖아요? 마치 <왝 더 독>에서 일어나지 않은 전쟁이 방송을 통해 일어난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을 보여줬듯이 그 장면이 송출됐을 경우 전세계에 미치는 효과는 정보가 수정될 때까지 마찬가지였겠죠. 디지털 테러리스트들이 주장하는 것도 “우리가 끼친 해는 모두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사실 디지털의 역습이 어떤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지 눈으로 보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911은 응답하지 않고 차선은 엉키고 행정 시스템이 엉클어지면서 도시 전체가 테러리스트의 무기가 되더군요.
셤: 사실 이 영화에서 악당들의 범죄는 상당히 용두사미 격인데 전 그것이 단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일종의 ‘미국인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도 했어요. 마구잡이 테러 장면을 블록버스터영화에서조차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대해 뭔가 심리적으로 꺼리는 마음이 있다는 거죠. 그렇긴 해도 악당들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은 들긴 하더라고요. 이 영화의 악당 토마스 가브리엘은 사실 <더 록>의 에드 해리스 같은 악당이죠.
여름: 스타일은 주드 로랑 비슷하고요. *.*
셤: 그래서 매가리가 없었구나. 주드 로와 에드 해리스의 결합이라니…. -.-
여름: 컴퓨터 천재치고는 너무 옷도 잘 입었어요. -..-
셤: 컴퓨터 천재는 옷을 못 입나요?
여름: 뭐 편견이겠지만, 케빈 스미스 감독이 분한 워록 같은 모습일 것 같거든요. 엄마집 지하실에 시스템 차려놓고 리클라이너 안락의자에 파묻혀 키보드 물고 빨고 잠들고…. -_-
셤: 영화에서는 다 그렇게 나오긴 하죠. 심지어 천하의 키아누 리브스조차 <매트릭스> 초반엔 그렇게 나오니까요.
여름: 카리스마는 떨어지지만 가브리엘은 예술적 야심은 있어 보여요.
셤: 너무 예술을 하셔서 탈이죠. 말이 너무 많아요. ^^
여름: 역대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따서 선전포고문을 만든 장면 있었죠? 조지 W. 부시 목소리로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테러리스트가 포고하는데 이상하게 병적인 쾌감이 들더군요. -.-
셤: 아이디어도 좋고 역설적인 정치적 함의도 좋은 장면이었어요. 더구나 미국 공화당 지지자로 유명한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하는 영화에서 그런 부분이 나오니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액션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저는 이 영화의 액션장면들을 총, 주먹, 자동차, 헬기 같은 전통적 도구들만 가지고 그렇게 멋지게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특히 놀랍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하나 좋았던 것은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액션의 단계를 세밀하게 전달해 쾌감을 배가시켰다는 점.
여름: 그처럼 무기가 단순하다 보니까 로케이션의 특성을 깊이 생각하고 안무한 액션 같습니다. 특히 맨 처음 뉴저지 골목 탈출과 워싱턴DC의 터널장면은 볼 만했어요. 반면 1층도 아닌데 차를 몰고 실내에 들이닥치는 발전소 장면이나 고가도로에서 전투기와 싸우는 장면은 약간 허풍이 과한 듯…. <트루 라이즈>도 아니고 말이죠. -..-
셤: <트루 라이즈>나 <스피드>의 잔영이 보이는 액션장면들이 있긴 했죠. 날아오는 자동차를 서 있는 두 자동차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피하는 장면이나 소방 파이프를 터뜨려 솟구치는 물로 헬기의 저격수를 떨어뜨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여름: 저는 맥클레인을 도와주기는커녕 앞길 막던 전투기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지상에 착륙하는 걸 보고 큰일났다 싶었어요. 왜 전편들에는 꼭 그런 밉상 캐릭터들이 막판에 따귀 한대 맞잖아요. 그런데 확실히 존 맥클레인이 나이가 들어 부드러워졌는지 굳이 패진 않더군요. -_- PG-13등급이라서인지 욕설도 줄고 담배도 줄고 머리숱도 줄고…아니, 이건 아니죠. +_+
셤: 머리숱이 줄었다기보다 아예 없죠. ^^ 전 DJ DOC 노래가 생각나더라고요. “억지로 빗어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감추지 말고 빡빡 밀어요요요~~~.”
김혜리_“<샴>은 소재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본적 이야기가 무리하지 않게 아귀가 들어맞고 장르 관습의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도 놀라움과 공포와 슬픔을 길어냈어요.” 이동진_“무서운 장면은 너무 예의가 바르더군요. 깜짝쇼에 해당하는 공포영화의 관습적 장면이 나올 경우 관객이 심리적으로 준비할 시간을 준다는 느낌까지 들었어요.”
여름: <샴>은 예고편을 보고 소재 때문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분리수술로 죽은 샴쌍둥이 한쪽 자매가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라고 다시 찾아온다는 이야기인데요. 소재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본적 이야기가 무리하지 않게 아귀가 들어맞고 장르 관습의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도 놀라움과 공포와 슬픔을 길어냈어요.
셤: 무엇보다 공포영화치고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정말 과장이 없는 호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야기와 인물의 심리에 충실하는 보기 드문 호러인데 공포스러운 장면 역시 무리한 연출을 하지 않더군요. 모든 면에서 예의바른 공포영화라고나 할까요. ^^;
여름: 얌전하고 정갈하다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셤: 사실 이 영화의 미덕은 공포보다 슬픔이죠. 슬픈 공포영화를 향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에요. 드라마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이 영화가 미국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렸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봤어요. 이야기가 흥미로우니까. 사실 <익사일> 같은 영화의 판권은 미국이 왜 샀나 싶잖아요? 그 영화의 장점은 스타일이지 결코 이야기가 아닌데, 그걸 어떻게 리메이크하냐고요.
여름: 오히려 <익사일>의 스토리는 서부극에서도 찾을 만한 원형적 이야기인데요. <샴> 감독들의 전작 <셔터>도 리메이크 중 아닌가요? 이 감독님들 성함이… 에….
셤: 도저히 욀 수 없는 이름임다. -_-#
여름: 팍품 웡품과 반종 피산타나쿤이군요.
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도 간신히 외웠는데….다음에 만나서 제가 이름 물어볼 때 중간에 쉬지 않고 쭈욱 읊으시면 제가 밥 삽니다. ^^ 제작자까지 다 외우면 한정식 삽니다. ^.~ 중간에 웃으면 무효고요.
여름: 타이 국민들은 우리 이름을 외는 게 어렵겠죠. 너무 짧아서요.
셤: <샴>을 보면서 역시 한국 배우들이 연기를 참 잘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설적으로. 연출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은데 배우들의 연기력이 너무 떨어지더군요.
여름: 그랬나요? 저는 쌍둥이 핌과 플로이 역을 맡은 마샤 와타나파니크에게 호감을 가졌는데요. 무척 아름답고 분위기가 있었어요. 타이어 연기는 제가 잘 판단할 수 없지만요.
셤: 남자주인공 연기가 특히 불만스러웠어요. 오히려 그의 아역을 한 배우가 좋았어요. 그런데 <샴>의 무서운 장면은 너무 예의가 바르긴 하더라고요. 깜짝쇼에 해당하는 공포영화의 관습적 장면이 나올 경우 설정이나 무대 혹은 카메라워크 등등에서 관객이 심리적으로 준비할 시간을 준다는 느낌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사인이 나올 때 아랫배에 2∼3초간 힘을 주고 있으면 뭐, 하나도 안 무섭더라고요. ^^
여름: 정리해보면, 집 안에 으스스한 공기가 감돈다- 죽은 자매를 본다- 찢어지는 비명과 버나드 허먼풍의 스코어가 흐른다- 남자친구에게 안긴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죠. 하지만 그 약점이 근본적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지워버리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셤: 기본적으로 모든 게 말이 되고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는 영화니까요.
여름: 저는 동적인 공포보다는 모든 것이 쌍으로 존재하는 고향집의 물건들- 옆구리 붙은 옷, 두개의 거울, 두개의 인형 등-이 자아내는 공기가 좋았습니다. 다만, 이 영화의 유령은 주인공의 샴쌍둥이인 만큼 좀더 주인공의 육체에 밀착해서 공포를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나한테 그녀가 붙어 있다”, 이 생각만큼 겁나는 것도 없잖아요.
셤: 그게 대중영화로서 좀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잃어버린 반쪽’이라는 표현을 멜로에서 흔히 쓰는데 이 영화는 그 말이 물리적인 의미 그대로라는 점에서 섬뜩한 측면이 있죠.
여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건, 감정의 균형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저주가 되는 것 같아요.
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분리수술을 받는 나이가 15살이잖아요? 그때가 분리 욕망이 가장 큰 시기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더라고요.그 무렵은 괜히 부모도 싫고 동생과도 말하기 싫고 혼자 있고 싶고 그렇잖아요.
여름: 그런데 샴쌍둥이는 혼자 있을 수 없죠. 둘 중 핌은 먼저 성년에 눈 뜬 것이고, 플로이는 그 시점이 똑같이 않았기에 슬픔이 시작된 거죠. 패럴리 형제의 <붙어야 산다>는 같은 소재를 다뤘는데요. 형제 한쪽이 연극에 출연하면 다른 한쪽은 무대공포증을 불사하고 검은 타이츠를 입은 채 억지로 그림자 역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표현했죠. ^^ 몸이 붙은 채로 한쪽이 첫경험할 때 옆에 있기도 하고요.
셤: 실제 그런 기록들이 있죠. 결혼한 한쪽이 섹스할 때 다른 쪽은 모르는 척 책을 보고 있는 식으로요.
여름: 연애 상대한테도 쉬운 장애는 아니군요. <샴>을 보다 든 생각인데 죽음이 슬픈 이유 중 하나는, 그토록 가깝고 사랑했던 사람도 죽음의 경계를 넘어간 다음 다시 돌아오면 반갑기 전에 무섭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셤: 슬픔과 공포는 확실히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가 있죠.
여름: 예. 제가 슬픔과 공포를 느낄 때 떠올리는 이미지도 같거든요. 시커먼 우물 바닥에 혼자 천천히 떨어지는 이미지.
셤: ‘슬픈 호러’라는 하위 장르는 정말 말이 됩니다. <샴> 초반에 한국이 배경이고 한국어 대사들도 꽤 나오죠. 타이 의사의 “한국에 가서 치료받으면 좋아지실 것 같습니다. 그쪽 의료진이 우수하잖아요?”라는 대사도 두번이나 나오고요. ^^
여름: 하하. 그 대목에선 다들 아이로니컬하게 보는 듯했어요. 사실 병원에서, 특히 가족 중 중환자의 치료를 종합병원에서 받을 때 유쾌한 기억이 많지는 않잖아요.
셤: 다들 아이로니컬이 아니라 시니컬하게 본 듯. ^^ 한국시장에 대한 상업적인 고려도 분명 있는 설정이겠지만, 흥미롭긴 했어요.
여름: <샴>을 포함해 타이 호러를 보면 확실히 불교신앙이 깔려 있어서 그런지 인과응보, 권선징악에 대한 신념이 강렬해요. 체념이나 화해의 분위기로 막을 내릴 때도 많고요.
셤: 확실히 그렇죠? 공포영화의 수원지로 꽤 괜찮은 문화인 것 같습니다. 사실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가 그토록 독특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도 힌두교적인 세계관에 있잖아요.
여름: 이 영화는 어쩌면 남자주인공이 두 여자를 한 여자로 사랑했어야 옳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셤: 저는 그 부분과 관련해서 시뮬레이션 이론이 생각났어요.미친 사람과 미친 척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전통적인 물음에 대해서 시뮬레이션이론에서는 ‘완벽하게 미친 척할 수 있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답을 내리잖아요? 그걸 이 쌍동이 자매의 경우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싶었던 거죠. 뭐 이 정도만 말씀드리죠. ^^
이동진_“<뉴욕에서 온 남자…>를 보면서 줄리 델피의 인생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정말 큰 영향을 끼쳤구나 싶더라구요.” 김혜리_“줄리 델피가 파리와 다른 유럽 국가, 미국에서 살면서 접하고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고 메모한 단상, 생활 이론, 상황을 종합해 만든 ‘귀납식’ 영화가 아닐까 싶었어요.”
여름: <샴>을 슬프고 예쁜 호러를 선호하시는 분, 하드고어를 꺼리는 여성관객에게 추천합니다!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는 줄리 델피가 쓰고 연출한 영화인데요. 아니, 요즘에는 왜 이렇게 <미트 페어런츠>를 언급하게 하는 설정의 영화가 많을까요? 뉴욕에 거주하며 베니스 여행을 갔던 커플이 파리에 사는 여자의 집을 방문한 이틀간의 이야기입니다.
셤: <뉴욕에서 온 남자…>를 보면서 줄리 델피의 인생에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정말 큰 영향을 끼쳤구나 싶더라구요. 영화의 온도나 색깔은 전혀 다르지만 연출 방식이나 대사를 넣는 방식은 링클레이터와의 작업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사가 좀 길고 관념적이면 일반적으로 꺼리는 마음이 생기는데, 상관없다는 태도 같은 게 이 영화에 있죠. 그게 링클레이터가 사실 제일 잘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남녀가 다른 데 끌리는 이유나, ‘작은 세상’ 이론 등을 굳이 끌어들여서 이 영화가 쓰고 있잖아요? 사실 영화 속 로맨스와 별 관계도 없는 이론들인데 말이죠.
여름: 줄리 델피는 <비포 선셋>의 공동 각본작가이기도 한데요. 그것은 아마 전체적 구성보다 대사나 디테일에 치중된 기여가 아니었을까요?
셤: 아마 자신의 대사 위주로 기여했을 거예요.
여름: <뉴욕에서 온 남자…>는 상상하건대 줄리 델피가 파리와 다른 유럽 국가, 미국에서 살고 일하면서 접하고 ‘아, 이건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고 수첩에 메모한 단상, 생활 이론, 상황을 종합해서 만든 ‘귀납식’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셤: 주인공 마리온과 잭이 연애 2년차라는 점도 애정의 유효기간이 30개월이란 연구논문과 관련이 있는 설정일 거예요. 사랑을 뇌의 화학물질 분비의 결과로 분석하는 이론 있잖아요. 줄리 델피는 그런 이론을 무척 좋아할 듯. ^.~ 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니 줄리 델피가 어떤 사람인지 몇 가지는 맞힐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영화에서 무척 튀는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작심하고 넣은 부분들이 있어요. 위선적인 사회운동가나 인종차별적인 택시운전사에게 마구 퍼붓는 장면이 그렇죠. 실제로 줄리 델피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여름: <비포 선라이즈> 연작의 셀린느도 제시(에단 호크)보다 사회 정의에 민감한 사람으로 나오죠.^_^ <뉴욕에서 온 남자…>는 처음에 언뜻 보면 미국 남자와 프랑스 여자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티격태격에 관한 영화일 것 같죠. 즉 프랑스 문화를 미국 남자가 불평하고 프랑스 여자는 변호하는 식으로 나아갈 것 같지만 실은 마리온이란 여자가 파리에 대해서 느끼는 지긋지긋함도 만만치 않다는 게 드러나요. 파리가 이렇게 로맨틱하지 않게 그려진 영화를 찾기도 쉽진 않을 거예요.
셤: 전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파리가 당신을 부를 때>나 <이터널 선샤인>과 기본적으로 같다고 봅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쏟아내는 것은 그럭저럭 하는데 주워담는 것을 참 못하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깊고 깊은 권태와 갈등이 장난기 섞인 남자의 표정과 그걸 보는 여자의 미소로 간단히 봉합되고 거리에서 낭만적으로 춤추며 끝나다니, 그 모든 일이 헛소동에 불과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여름: 줄리 델피가 연애에 대해 더이상 꿈을 꾸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 그 결말을 보면서도 조만간 그들은 곧 헤어질 거라고 생각한 건 저뿐일까요? +_+ 사실 이 영화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건 갈등과 권태고 사랑의 희열은 공감갈 만큼 충분히 묘사되지 않거든요.
셤: 이 영화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고 그런 연애담만 하나 늘었다. 정말 사랑했는데”까지인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줄리 델피가 대사는 분명히 잘 쓴다고 생각합니다. 중반까지 꽤 재미있었어요. 장편 영화 전체를 보는 안목이나 감이 부족한 것이죠.
여름: 예. 줄리 델피의 총명함과 예민함은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굳이 성과를 찾는다면, 그녀의 대표작이기도 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이 우연이 아닌 정말 희귀한 보석임을 방증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까요? -_-# 역시, 그렇게 말하면 너무 서운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