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귀환한 <다이하드> 시리즈의 영웅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 형사에게 시대는 우호적이지 않다. 액션 영웅 클럽의 상석은 CG와 한몸되어 날아다니는 만화 출신 슈퍼히어로들이 차지했고, 웬만한 스릴러영화의 주인공은 컴퓨터 전문가다. 그의 장기였던 이죽거리는 구변도 애니메이션의 수다쟁이를 당할 수 없고, 그 시절 동지를 찾아본들, 캘리포니아 주지사 집무실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보일 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다이하드4.0>의 영리한 각본은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환경을 어물쩍 외면하거나 맥클레인에게 부랴부랴 정보통신 자격증을 따게 만드는 미봉책을 쓰지 않는다. 대신 시대의 변화와 주인공의 무력함을 이야기 핵심으로 대뜸 끌어들여 정면 돌파한다. 천재 해커 토마스 가브리엘(티모시 올리판트)이 이끄는 전문가 집단은, 잘나가는 개인 해커들의 경쟁심을 이용해 국가정보, 통신, 교통, 수도, 전기, 금융 인프라를 총체적으로 파괴하는 ‘파이어 세일’(모든 물건이 없어져야 끝나는 세일) 작전을 준비하고 행동에 돌입한다. 소원해진 딸 루시를 만나러 뉴저지에 들렀던 뉴욕 경찰 존 맥클레인은, 블랙 리스트에 오른 해커 중 하나인 매트 패럴(저스틴 롱)을 데려가던 중 중무장한 프로 암살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맥클레인과 패럴이 도착한 워싱턴DC는 교통과 통신 마비로 이미 아수라장이고, 정부는 전국으로 확산되는 지옥을 막는 데 무력하다. 사태 발생 경위는 이해 못해도 패럴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음을 직감한 맥클레인은 주저하는 청년을 질질 끌고 험난한 시간외 근무에 나선다. <다이하드4.0>을 관통하는 러닝 개그는, “만사는 직접 찾아가 문을 두드려야 풀린다”고 믿는 컴맹 존 맥클레인과 골방에 틀어박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살아온 젊은이 매트 패럴의 문화적 차이다. 뭔가 터지고 부서질 때마다 넋이 빠지는 패럴은 “방금 봤어요?”라고 되묻고 맥클레인은 “봤냐고? 내가 했다”고 면박을 준다. 하지만 <다이하드4.0>은 아날로그적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대립시킨 다음 “역시 옛것이 최고”라는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이제 존 맥클레인은 혼자 싸워 이길 수 없다. 패럴의 역할은 전작 조연들의 ‘거들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디지털 시대 엘리트의 머리와 아날로그 액션 영웅의 몸은 ‘합체’한다. 관객은 포기할 줄 모르는 노련한 맥클레인에게 동화되거나, 그의 등 뒤에서 덜덜 떨며 키보드를 두들기는 패럴과 동일시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 <다이하드> 1, 2편을 극장에서 본 세대라면 적의 무전기를 빼앗은 맥클레인이 전통의 대사 “대장 바꿔!”를 날리는 순간 덩달아 흥이 날 터다. 악역 가브리엘은 카리스마는 부족하나 개성이 있다. 특히 전 현직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짜깁기한 선전포고를 정부에 던지는 위트는 높이 살 만하다.
<다이하드4.0>의 액션은 적절한 로케이션과 그것을 잘 활용한 촬영, 그리고 탁월한 스턴트의 삼중주로 빛을 발한다. 여기서 CG는 한 걸음 물러서 있다. 지하실, 엘리베이터 통로, 교차하는 고가로, 양쪽에서 차들이 밀려드는 터널 등 추격전과 액션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한 한 많은 무대를 찾아 <다이하드4.0>은 동분서주한다. 경찰차 대 헬기, 승용차 대 엘리베이터, 대형 트럭 대 전투기 등 조합을 달리하며 벌어지는 대결의 시퀀스는 재미와 스릴의 패턴이 매번 달라 질리지 않는다. 다만 삼각함수라도 계산한 듯 자동차로 헬기를 맞히는 장면과 붕괴하는 고가도로에서 쫓기는 장면의 허풍은 이 시리즈보다는 제임스 카메론이나 마이클 베이 영화에 어울린다.
무엇보다 <다이하드4.0>은 현재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개인과 사회는 이제 대면 접촉이 아니라 신호에 의해 움직인다. 신호가 교란되면 세계는 흔들린다. 미국 의사당이 무너지는 가짜 이미지가 전세계에 송신됐을 때 단기적 파급 효과는 실제 의사당이 폭파당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테러리스트들은 심술궂게 보여준다. “자꾸 시스템, 시스템하지 마라. 너가 말하고 있는 건 사람들로 꽉 찬 나라다!” 패럴을 향한 맥클레인의 한마디는 복잡한 생각을 부른다. <다이하드4.0>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영화이며, 시리즈의 적절한 업그레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