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촬영현장에서 안성기는 ‘대장님’으로 불렸다. 그가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신애(이요원)의 아버지이자 강민우(김상경)가 근무하는 택시회사 사장인 예비역 대령 박흥수.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박 대령은 정치에 물든 계엄군에 맞서 시민들을 지휘하는 ‘대장’이 된다. 영화 속에서만 그가 대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스크린 바깥 촬영현장에서 그의 대장 역할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안성기는 촬영장에서 80년 광주를 함께 살았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그랬듯이 배우들과 스탭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니 김지훈 감독이나 김상경 등이 그를 여전히 ‘대장님’이라 부르고, 수시로 그의 휴대전화에 ‘대장님 보고 싶어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박 대령 역할은 어떻게 해석했나. =가장 영화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장치로서의 인물, 픽션적인 인물이다. 계엄군과 시민군을 연결시키는 인물, 그리고 시민군을 규합하는 데 체계적인 사람들이 모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 인물을 설정한 것 같다. 그런데 또 택시회사 사장이라는 지위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여간 박 대령이 조금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한 면은 있다.
-어떻게 출연을 결정했나. =우선 시나리오가 좋았다. 분명히 슬프고 가슴아픈 이야기인데도 김지훈 감독은 영화 안에 재미까지 불어넣었다. 시각도 상당히 영화적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메시지는 제대로 전달하고 있더라.
-소재의 민감성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만약 정치적인 시각으로 다뤘으면 생각이 달라졌을 거다. 그런데 이건 인간들의, 시민들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영화다. 광주라는 상황 외에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출연하게 됐다.
-박 대령은 <실미도>의 최 준위나 <묵공>의 항엄중과 비슷한 면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 일단 역할 자체가 비슷한 것 같고, 또 내 모습이 어디로 갈 수가 없잖나. 대부분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려는 인물로 나오다 보니 그 느낌이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완전히 똘아이라든지 굉장히 성격이 사납거나 그러면 다른 느낌을 줄 텐데.
-다른 배우들이 광주항쟁에 관해 잘 몰라서 조언을 해줘야 했을 것 같다. =그런 것보다는 그냥 내가 당시에 겪고 느꼈던 것을 이야기해준 것밖에 없다. 그런데 아마도 다들 망월동 묘소 참배도 가고, 당시 참가자들도 만나고 하면서 그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되겠구나, 잘 만들어야겠구나 하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갖게 됐을 것이다.
-80년 광주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은 어떤 것인가. =당시 이장호 감독님과 서울 길동, 천호동 인근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찍고 있었다. 감독님이 애써 구해온 정보를 들으며 모두들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광주에 내가 아는 수녀님들이 있었고, 74년 군대 갔을 때 상무대에서 훈련받은 적도 있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황이 눈에 선했다. 그동안 빚진 마음으로 살아온 게 사실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섬뜩했을 때도 있었을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을 실제로 도청에서 찍었는데, 당시 현장에 계셨던 분들이 오셔서 당시 상황을 너무 생생하게 설명해주는데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 아, 여기서 이렇게 있다가 모두 희생됐구나 하는 생각에. 그 현장에서 같은 장면을 찍다니, 참 묘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개인적으로 특별히 와닿는 장면은. =영화 안에 비장하고 슬픈 장면이 굉장히 많아서 그런지 나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김상경씨는 요원이가 내 딸인 줄 모른 채 좋아하는데, 그러다가 서로 만나게 돼서 인사할 때 상황이 꽤 재밌다. 그리고 그 웃음도 페이소스가 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나. =5개월 정도 찍었는데 나야 육체적으로 힘들 건 없었다. 김상경씨가 고생했지. 부담감이 있었다면 정신적인 쪽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완성도가 조금 떨어지면 유족분들이나 관련된 분들에게 누가 될 것이라는 부담 말이다.
-워낙 젊은 배우들과 작업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아니, 요즘에는 어느 현장을 가도 내가 최고참인데…. (웃음) 가끔 송재호 선배님이 오시면 ‘아이고, 선배님’ 하면서 깍듯하게 모시고. (웃음) 하여간 모두들 좋은 팀워크 속에서 즐겁게 일한 것 같다.
-김지훈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목포는 항구다>가 굉장히 잘 만든 영화라고 본다. 장르가 조폭코미디라서 그렇지, 완성도가 있고 치밀한 영화다. 굉장히 실력이 있고, 스탭과 배우들의 감정을 잘 추스를 줄도 아는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