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페이지(영문판은 870페이지)의 책장이 스크린에서 팔락팔락 넘어간다. 조앤 K. 롤링의 원작 소설 일곱권 가운데 가장 부피가 육중한 5권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신통하게도 워너브러더스의 <해리 포터> 시리즈 중 가장 러닝타임이 짧은 영화로 완성됐다. 해리(대니얼 래드클리프)의 호그와트 마법학교 5학년은- 엔딩 크레딧 10분을 빼면- 130분여 동안 빠르게 흘러간다. 각색의 압축률이 높다 보니, 기승전결과 직결되지 않는 인물과 에피소드는 불가피하게 삭제되거나 축소됐다. 퀴디치 게임이 빠진 사실은 그리 아쉽지 않지만, 마법사 가정의 일상, 마법사 사회의 행정 시스템 및 공공 서비스 같은 상상력 발군의 세부가 줄어든 점은 아프다. 각색 과정에 제일 피해가 막심한 인물은 해리의 단짝 론(루퍼트 그린트). 소설에서는 기숙사 반장으로 임명되고 퀴디치 선수로 뽑혔는데, 영화만 본 관객은 알 도리가 없다.
호그와트 마법학교 5학년이 된 해리 포터가 겨뤄야 할 상대는 볼드모트(랠프 파인즈)와 ‘죽음을 먹는 자들’만이 아니다. 볼드모트의 귀환 사실을 부인하고 정치적 이익만 추구하는 마법부 수뇌부는, 차관 돌로레스 엄브릿지(이멜다 스턴톤)를 호그와트의 교수로 파견해 덤블도어 교장(마이클 갬본)을 밀어내고 교육을 장악하려 한다.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에 대비해 자기를 지킬 필요성을 느낀 호그와트 학생들은, 학교가 가르쳐 주지 않는 방어술을 익히기 위해 해리를 리더 삼아 지하 동아리 ‘D.A.’(덤블도어의 군대)를 결성한다. 한편 과거 볼드모트와 싸웠던 덤블도어 휘하 불사조 기사단도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 권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도들> 출간을 2주 앞두고 개봉하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완결편에서 해리가 죽는다”는 풍문에 근거를 제공한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5편에서 해리는 어둠의 마왕 볼드모트의 의식과 자기의 의식이 연결돼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볼드모트의 무기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른 한쪽이 살아 있는 한은 어느 쪽도 살 수 없다”는 오래된 예언은, 해리에게 언젠가 볼드모트를 죽이거나 그가 죽어야 한다는 숙명을 가르쳐준다.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전편들과 달리 신기한 동물이나 세트를 새로운 구경거리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하긴 5학년이면 그만 놀랄 때도 됐다. 대신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반항의 쾌감을 선사한다. 말썽쟁이 프레드와 조지는 엄브릿지의 눈앞에서 학교를 불꽃놀이로 뒤집어놓고 통쾌하게 중퇴해 전설이 된다. 권위에 물리적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지닌 10대 마법사들의 저항은 머글(마법사 아닌 인간) 틴에이저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법하다.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은 시리즈의 후반부로 진입하는 발판과 실마리를 마련하느라 바쁜 장(章)이다. 이 과정에서 해리와 관객은 이미 친숙한 등장인물들의 감춰진 이면을 발견하고 재평가하게 된다. 죽은 아버지 제임스 포터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한결같이 믿어온 해리는 스네이프 교수의 사춘기 기억 속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한때 약자를 놀림감 삼는 어리석고 오만한 소년이었음을 목격한다. 멍청이 취급을 받았던 네빌은 놀라운 잠재력을 드러내고 급우들에게 ‘미치광이’로 불리는 괴짜 소녀 루나 러브굿은 남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저주만은 아님을 해리에게 보여준다.
마음속 분노를 부쩍 자주 드러내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의 해리는 <스타워즈> 속의 청년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비슷할 뿐이다. “당신은 사랑과 우정이 뭔지 영원히 모를 거야”라고 숙적 볼드모트에게 긍지높게 외치는 이 소년에게는 가엾은 아나킨이 갖지 못했던 친구들과 현명한 보호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