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장르의 기막힌 혼합
<클라우드> The Cloud/ 그레고르 슈니츨러/ 독일/ 2006년/ 105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두세 가지 장르를 배배 꼬인 전선줄처럼 뒤섞어가는 장르 혼합은 다반사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장르의 흐름이 이야기의 맥락을 타며 급변하거나 리듬을 타면서 경계를 그어가는 그 자체가 재미를 주는 작품은 많지 않다. 마치 세 토막의 장르를 무처럼 동강내 시미치 뚝 떼고 딱딱 이어붙인 듯한 <클라우드>는 언뜻 매끈한 할리우드영화 같다. 거침없이 장르적인 연출이지만 언어와 건축물, 그리고 그 주인인 사람이 명백한 독일산이다. 처음은 밝고 명랑한 십대 학원물이다. 한나는 등교보다 늦잠 자는 게 좋고, 여자친구와의 수다도 좋지만 핸섬한 남자에게 눈이 돌아가는 평범한 소녀로, 부유한 집의 외아들 엘마와 가벼운 사랑의 암초를 헤치고 눈을 맞춘다. 그걸 키스로 확인하는 순간 요란한 사이렌이 울린다. 두 번째 장르, 암울한 재난영화의 시작이다. 프랑크푸르트 근교 핵발전소에 사고가 일어나 핵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은 빠르게 패닉 상태에 빠져든다. 가족단위 피난길에 한나는 엄마 대신 동생을 데리고 나서는데 지옥행렬이 따로 없다.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는 비극이 동생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정점을 이루는 듯한데, 이 재난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침내 재난의 회오리에 무릎 꿇은 한나는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쓰러진다. 문제는 그게 산성비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 번째 장르, 슬픈 로맨스는 한나가 정신을 차리면서 시작된다. 방사능 오염으로 머리칼이 온통 빠져버린 한나의 병원으로 엘마가 찾아오고, 두 사람의 사랑은 어렵게 다시 꽃피는 듯한데….
신체절단 왕따의 러브스토리
<로만> Roman/ 안젤라 베티스/ 미국/ 2006년/ 92분/ 부천 초이스
안젤라 베티스를 아십니까.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열혈 호러영화팬이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베티스는 러키 매키 감독의 <메이>와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즌1의 <식걸>을 통해 호러 영화계의 새로운 뮤즈로 칭송받아온 여배우. 그녀의 첫 연출작인 <로만>은 안젤라 베티스가 매키 감독과 작업하면서 그저 대본이나 열심히 암기한 건 아니라는 멋진 증거다. <로만>의 주인공인 용접공 로만은 이상한 남자다. 왕따에다 숫기도 없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옆집 사는 귀여운 여인을 흠모하는 것으로, 그의 배배 꼬인 흠모는 여인을 살해한 뒤 신체를 조각조각 잘라서 함께 소풍을 가는 기행으로까지 이어진다. 시체애호증 환자 로만의 삶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여자로 인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살면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타인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여기서 러키 매키의 영향력을 발견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로만>은 굳이 매키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립적인 감독 안젤라 베티스의 재능을 보여준다. 올해 부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비극적인 신체절단 왕따의) 러브스토리. 아주 슬프다.
특별한 약을 찾으세요?
<스페셜> Special/ 할 하버만, 제레미 패스모어/ 미국/ 2006년/ 85분/ 부천 초이스
LA의 주차단속요원 레스는 슈퍼히어로 만화의 열렬한 팬이고, 위반자의 애절한 눈빛에 쉽게 흔들리며, 매일 저녁 혼자 전자레인지에 냉동식품을 데워 먹는 외로운 남자다. 새로 나온 우울증 치료제의 임상실험에 참여하면서 그의 무기력한 일상이 구원받는다. “스페셜”이란 이름의 이 신약은 뇌 시냅스 중 ‘자기 의심’에 관련된 부분을 차단하는 제품. 놀랍게도 이 약을 복용하자 레스는 벽을 통과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고 공중부양까지 가능한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누구의 눈에도 레스의 초능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슈퍼히어로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투쟁이 시작된다. 여기에 그의 주위를 맴도는 검은 옷의 제약회사 직원들이 가세하면서 레스는 음모론을 확신하고…. 과연 일반인들이 그의 초능력을 못 알아보는 걸까, 아니면 모든 것이 레스만의 망상의 산물일까. 영화는 영리하게도 분명한 답을 유예하며 관객을 레스의 혼돈에 동참시킨다. 결말에 다가갈수록 좌절당한 소시민의 양 어깨에 실린 과도한 감상이 부담스럽지만, <메트로> <딥 블루 씨> <Mr. 히치: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등서 조연 연기로 뼈가 굵은 마이클 라파포트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력을 전한다.
시대와 청춘을 별빛에 담다
<별빛 속으로> 황규덕/ 한국/ 2007년/ 104분/ 개막작
중년의 독문학과 교수 수영(정진영) 앞에 한쌍의 나비가 홀연히 나타난다. 홀린 듯 나비를 뒤따라가다 강의실에 도착한 수영. 학생들이 수영에게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자 수영은 오래전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기이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대학생이었던 시절 젊은 수영(정경호)을 사로잡았던 삐삐(김민선)라는 소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삐삐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강의실에서 시를 읽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릴 만큼 감상적이기도 하지만 운동권으로서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할 만큼 실천적이기도 하다. 그런 삐삐에게 수영이 매력을 느낄 즈음 그녀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수영은 그 뒤로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을 연이어 겪게 된다. 노란 셔츠를 입은 사내의 부탁으로 그의 여동생을 과외하게 되고 그 무렵 죽은 줄 알았던 삐삐도 실제처럼 그의 앞을 자꾸 서성인다. <철수 영희>를 통해 정직하고 사랑스러운 소극의 리얼리즘을 선보였던 중견 감독 황규덕은 <별빛속으로>에서 어두운 근현대사를 호접몽의 시간으로 재구성하는 이야기꾼의 실력을 새롭게 선보인다. 이 영화는 연출자 자신이 어두웠던 한 시대를 지금 돌아보고 기억하는 태도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무한한 무경계의 우주적 시간을 펼쳐내는 혼몽의 서사이기도 하다.
사람 뜯어먹는 양들의 침공
<블랙 쉽> Black Ship/ 조너선 킹/ 뉴질랜드/ 2006년/ 87분/ 월드 판타스틱
오직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인간들만이 양을 소재로 공포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게다. 한국 대성그룹이 영화 투자에 참여한 <블랙 쉽>은 유전공학으로 인해 괴물로 변한 양떼들이 평원의 인간들을 열심히 뜯어먹는다는 이야기다. 양공포증을 앓고 있는 헨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농장을 형 앵거스에게 팔기위해 시골로 내려온다. 문제는 형 앵거스가 몇명의 미친 과학자들과 함께 양을 대상으로 한 유전공학 실험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쪼다 같은 환경운동가 몇명이 가세해 돌연변이 양의 태아를 세상에 풀어놓자 헨리의 양공포증은 악몽으로 변한다. 농장의 양들은 육식을 즐겨하는 괴물로 변해 사람들을 공격하고, 물린 사람들은 거대한 반인반양으로 돌변해 또다시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건 농담인가? 물론 농담이 맞다. <블랙 쉽>은 20년 전의 피터 잭슨이 만들었을 법한 괴작으로, 관객을 무섭게 만드는 법 결코 없이 키득거리는 어투로 양과 인간의 사투를 그려낸다. 사실 털복숭이 초식 포유류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웃기는 전략을 제외한다면 <블랙 쉽>은 그저 평범한 저예산 악동영화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만 디지털 특수효과 시대에 가내수공업적 특수효과로 창조한 고어장면들만큼은 설익은 양갈비처럼 비리고 맛나다.
트로마의 화끈한 구역질
<폴트리가이스트> Poultrygeist: Night of the Chicken Dead/ 로이드 카우프먼/ 미국/ 2006년/ 99분/ 금지구역
부천에 트로마 영화사가 빠지면 제 맛이 날 리 없다. <폴트리가이스트>는 트로마의 수장인 로이드 카우프먼의 신작. 특유의 재기발랄한 악취미와 말도 안 되는 연기와 엉성하지만 토악질을 자아내는 고어장면들은 여전하다. 공동묘지에서 여자친구 웬디와 섹스를 시도하던 아비는 좀비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로부터 한 학기가 지난 뒤 아비는 고대 인디언 묘지에 세워진 치킨 프랜차이즈점에 항거하던 웬디를 만난다. 문제는 그녀가 열혈 동물보호론자이자 레즈비언이 됐다는 사실이다. 아비는 복수를 위해 치킨 프랜차이즈점에 취직해버린다. 하지만 죽은 인디언의 영혼이 죽은 닭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닭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메스껍게 푸른 침을 흘려대는 반인반닭 좀비로 변한다. <폴트리가이스트>는 로이드 카우프먼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트로마적’으로 화끈해진다는 증거다. 주류영화나 미국의 정치현실을 꼬집는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특별히 언급할 거 없을 테고, 배변행위까지 고어장면과 휘저어 관객의 비위를 공략하는 너절한 유쾌함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듯한 기분이다. 포르노 스타 론 제레미 같은 너절한 카메오를 찾는 것도 징글징글 재미나다. 딱 ‘트로마 영화’다. 다들 그걸 기대하겠지만.
<블레어 윗치 프로젝트>식 뱀파이어 도시전설
<뱀파이어의 일기> Vampire Diary/ 마크 제임스, 필 오셰아/ 영국/ 2007년/ 88분/ 월드 판타스틱
영화감독인 할리는 뱀파이어를 추종하는 런던 고스(Goth)족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는 작업을 한다. 물론 고스족들이 추종하는 것은 피를 부르는 제전이 아니라 일종의 패셔너블한 라이프 스타일일 따름이다. 할리는 고스족 클럽에서 아름다운 흑발의 여인 비키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동시에 런던에서는 뱀파이어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할리는 비키가 실존하는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빠져버린 사랑을 물릴 수도 없는 일인데다가 급기야 비키는 뱀파이어 아기를 임신 중이다. 비키의 일거수일투족을 캠코더로 기록하기 시작한 할리는 친구들을 살해해서라도 그녀에게 신선한 피를 공급하기 시작한다. 디지베타로 찍힌 <뱀파이어의 일기>는 <블레어 윗치 프로젝트>의 형식을 느슨하게 빌려온 저예산 호러영화다. 마크 제임스와 필 오셰아 감독은 주인공들의 손에 들린 디지털카메라와 컴퓨터 화면의 영상 실험을 통해 ‘뱀파이어 도시전설’을 런던 언더그라운드의 고스 문화와 접합한다.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으로 찍힌 런던 젊은이들의 문화 탐방을 참아내고 나면 의외의 쇼크가 강타하는 호러영화이자 근사한 레즈비언 러브스토리가 시작된다.
당신의 심장을 강타할 공포의 사운드
<공포의 스튜디오> Reverb/ 이탄 아루시/ 영국/ 2007년/ 88분/ 월드 판타스틱
뮤지션들의 새 앨범 홍보시에 항상 터져나오는 ‘녹음실 괴담’이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촉망받는 독립호러영화 감독 이탄 아루시의 신작 <공포의 스튜디오>는 녹음실 괴담에 대한 영국식 해석이다. 록 뮤지션으로 성공을 거두고 싶어하는 알렉스와 여성 보컬 매디는 메이저 음반사의 녹음실에 몰래 숨어들어 새로운 곡을 녹음하려 한다. 밤을 새며 작업에 열중하던 두 사람은 샘플로 뜬 노래에 “도와줘요!”라고 외치는 기괴한 목소리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매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또다시 녹음실로 향하고, 샘플에 녹음된 목소리가 자살한 천재 음악가 그리핀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매디는 알렉스를 구하기 위해 녹음실로 달려간다. <공포의 스튜디오>의 전반부는 생각 이상으로 무시무시하다. 이탄 아루시 감독은 수많은 녹음실과 복도와 지하실이 있는 거대한 규모의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순전히 음향효과와 어둠만을 이용해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데 성공한다. 전모가 밝혀지는 후반부에서 시각적인 잔재주를 부리면서는 관습적인 함정에 빠져들긴 하지만 <공포의 스튜디오>의 전반부는 일종의 ‘사운드 공포영화’로서 썩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