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거절할 수 없다> 쓰치야 겐지 지음/ 좋은책만들기 펴냄
다운시프트족이 유행이라고 한다. 밤을 새운 만큼 보장되는 높은 연봉, 사람들에 치이지만 남들 다 알아주는 직책보다 돈 덜 받더라도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운시프트족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월급이 적고 일은 고되고 많은 직장을 누구인들 선택하고 싶겠는가. 원치 않았으나 제멋대로 빡빡해지는 인생, 지칠 때면 나른한 말투로 장동민처럼 “그까이꺼, 대충”이라고 내뱉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쉽게 거절할 수 없다>의 저자 또한 그런 사람이다. 쓰치야 겐지는 도쿄 오차노미즈여대의 철학교수인데, 자신이 제자들과 가족들에게, 지인들에게 얼마나 무시당하며 사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명예와 일로부터 도망다니며 살고 있는지를 들려준다. 끊임없는 투덜거림의 연속인 듯, 느슨한 듯 보여도 뼈가 있는 유머 감각이 일품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질문은 평범하다. “사람들은 뭐가 즐거워서 여행을 하는 걸까?”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답이 튀어나온다.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이유라면, 차라리 좀더 비일상적인 전쟁, 화재, 암, 수술, 입시에 도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일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뿐이라면 휴직하거나 해고당하면 된다. 추억을 만든다? 자신의 나쁜 행실이나 만행의 기억을 더 선명히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여행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고생스럽고 불만투성이었던 여행을 마치고 난 뒤 저자의 어머니가 “즐거웠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주는 만족감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동문서답하는 와중에, 좋은 차를 마신 것 같은 깔끔한 뒷맛이 남는 짧은 에세이들의 모음이 바로 이 책이다. ‘큰인물답다’는 말에 숨은 속뜻을 풀이하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말 같지만,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사실 의문문이나 감상문으로 명령을 하는 유형이었다. 회의 직전에 아랫사람에게 “자료가 없는데?”라고 말 한마디 건네거나, 맥주잔을 냉큼 비우고는 다른 이들에게 빈 잔을 흔들며 “목마르지 않아요?”라고 묻는 사람을 겪어보았다면, 당신은 쓰치야 겐지와 함께 웃을 수 있다. <쉽게 거절할 수 없다>는, 일과 끝에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사소한 희로애락을 이야기하는 친구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