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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광고모델의 윤리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는 신용사회의 냉혹한 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척이나 편리한 시스템인 신용카드가 어떻게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지게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가정이 망가지고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추리소설의 틀을 빌려 증언한다. <화차>를 읽고 나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대부업 광고를 떠올렸다. 신용카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여론의 집중포화가 대부업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대부업이 과장광고를 하는 것이 문제인지, 대부업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 대부업의 이율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인지 헛갈리는데 아무튼 대부업만 두들겨맞는 걸 보니까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좋겠다는 심술궂은 생각마저 들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때로 신용카드 회사와 은행도 대부업과 별반 차이없는 이자놀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회사나 은행은 대부업에 쏟아지는 비난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요즘 대부업 광고에 등장한 배우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 중도하차한 배우들도 많고 스스로 출연을 자제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듯하다. 여론이 이렇게 형성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대부업이나 은행이나 뭐가 다른가라는 문제의식이 있긴 해도 더 나쁜 것이 확대되는 것은 막을 필요는 있다. 하지만 대부업 광고가 없다고 고리대금의 피해가 없어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부업이 아니라도 신용카드나 은행 빚으로 파탄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용카드나 은행의 광고 모델을 하더라도 꺼림칙한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과연 광고모델은 제품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최근 경제정의실천연합에서 아파트 광고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귀하가 아파트 광고에 출연함으로써 그동안 연예인 활동으로 쌓아온 이미지와 명성이 거품아파트를 판매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아파트 광고 출연을 자제해달라는 호소라고 한다. 배우들이 얼마나 호응할지 알 수 없지만 대부업 광고 못지않게 숙고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부동산 거품을 잡는 건 정부의 몫이지만 나의 광고가 부동산 거품에 일조한다는 것을 무시해서도 곤란하다. 배우로서 쌓은 신뢰가 엉뚱한 곳에 이용된다면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어떻게 보면 모두 괜찮고 달리 보면 다 개운치 않은 일이다. 신용카드 광고는 괜찮고 대부업 광고는 안 된다는 기준도 ‘신용카드나 대부업체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면 흔들리기 십상이고, 비정상적 가격이 형성된 아파트 광고가 문제라면 효과에 비해 턱없이 비싼 화장품 광고는 왜 괜찮은지 스스로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에 고종석씨가 쓴 “윤리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소시민으로서 넘어서는 안 될 경계가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절절히 와 닿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계긋기가 어려워도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골치 아프게 생각할 것 없이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거나 본질적으로 같더라도 이건 안 하겠다고 결심하거나. 전자는 윤리를 따져 묻지 않아도 가능해서 자꾸 기준을 후퇴시키는 편리한 방향인 반면 후자는 거듭 윤리를 따져 물어서 기준을 세워야 하는 피곤한 길이다. 아마 당장 눈앞에 돈이 보이고 까다롭게 고민할 필요없다는 유혹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광고모델에게 제품의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흔히 공인이니 이러 저러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만 나는 그들이 공인이어서 특별한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필요한 것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개인의 윤리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윤리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