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칸영화제에 다녀왔다. 일일이 세보지는 않았지만 보다가 중도에 뛰쳐나온 영화까지 포함하면 칸에서 본 영화는 30편쯤 되는데, 만약 누군가 가장 좋았던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60주년 기념작이기도 한 <각자의 영화>를 선택하겠다. 내로라하는 세계의 감독 35명이 만든 33편의 단편이라니,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물론 33개의 단편 중 몇몇은 꽝이었지만, 대부분이 ‘영화관’이라는 공통 주제를 재치있게 소화해낸 덕에 온갖 ‘예술’을 과다섭취한 부작용에 시달리던 뇌가 모처럼 해방감을 누리는 것 같았다. 신명나는 월터 살레스, 유쾌 통쾌 상쾌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동적인 다르덴 형제의 영화도 좋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은 건 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켄 로치의 단편 <해피 엔딩>이다. 영화는 멀티플렉스 매표구 앞에 줄서 있는 부자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하지만 아들은 어떤 영화를 볼지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마침내 차례가 왔건만, 아들놈이 여전히 갈팡질팡하자 아버지는 극장 직원에게 물어본다. “어떤 영화들이 있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직원은 답한다. “이건 이렇게 저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이야기고, 저건 어쩌고저쩌고 해서 피가 난무하고….”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극장을 나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간 쪽에서는 축구경기의 환호성이 들린다. 켄 로치는 멀티플렉스를 통해 대량 공급되는 상업영화를 보느니 축구 경기장을 찾는 게 건강하다는 메시지를 명쾌하게 던지는 것이다.
켄 로치는 이 단편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내 생각에 상업영화의 클리셰는 사지가 절단되고 사람들이 곳곳에서 죽어가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건 거짓말이다. 무책임한 거짓말이다”라고 일갈했는데, 그건 곧바로 <밀양>과 관련한 대담에서 영화평론가 허문영에게 건넨 이창동 감독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영화가 그렇게 윤리적인 매체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폭력을 다루는데, 폭력을 새롭게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왜 영화 하는 사람끼리 서로 상찬하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관객의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남의 몫인가…. 영화라는 매체가 관객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니면 그냥 소비되고 마는 것인지.”
사실, 나는 켄 로치와 이창동의 이야기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르영화와 상업영화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또 세계에서 생산되는 영화의 90% 이상은 ‘소비’를 위해 만들어지며, 그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두 감독의 근심어린 말에 마음이 쏠리는 건 인간의 존재와 세계를 사유하는 영화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하는 영화와 이런 영화를 ‘재사유’하려는 시각을 비아냥거리고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떤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되든 안 되든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이해가 안 되는 영화는 ‘흥, 저게 뭐야’ 하면서 짓밟으려 한다”는 한 영화 애호가의 말에 나 또한 절대 공감한다. 하긴, 코언 형제도 무지렁이 카우보이조차 어려운 예술영화(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를 보고서 진심어린 감동을 먹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유쾌하게 보여줬으니 <각자의 영화>, 고놈 참 은근히 묵직한 영화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