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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존 카메론 미첼
김민경 2007-06-19

오래지 않은 과거라 얘기하기 매우 쑥스럽긴 하지만, 입사 초기의 나는 선배들이 ‘사람’으로 안 보여서 마음고생을 했다. 아마 독자 시절 갖고 있던 <씨네21>의 아우라가 상당했던 탓이리라. 이 심약한 수습기자는 선배들의 카리스마에 마음이 잔뜩 오그라든 채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선배들의 ‘인간적’ 면모를 발견한 건 매주 열리는 회의시간, 그 주의 배우 인터뷰를 배정할 때였다. “선배들도 좋아하는 배우 앞에서 가슴 설레는 보통 사람들인 게야!” 지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줄만 알았던 선배들의 눈빛이 희번덕 욕망의 도가니로 화하는 순간을 그때 목격했다. 오늘도 A선배는 ‘핫’한 남자배우 인터뷰를 맡기 위해 그토록 얼굴에 화색을 지피며 편집장님께 신호를 보내고, 내공있는 중견 여배우에 특별한 선호를 지닌 B선배는 ‘안경이 터져나갈 것 같은’ 풍성한 반달 눈웃음을 짓는다. 그 이상 높은 선배들은… 생략.

아무튼 이번주엔 내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헤드윅> 콘서트와 <숏버스> 특별상영전으로 내한한 존 카메론 미첼 인터뷰를 맡게 된 것이다. 기자가 되기 전에도 되고 난 뒤에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생의 사건이었다. <헤드윅>이 나온 2001년 이래 내가 이렇게 마음을 송두리째 맡겨버린 사람은 또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종교를 만든다면 기꺼이 광신도가 될 것이요, 그가 군대를 이끈다면 발벗고 백의종군할 터였다. 그를 향한 정체모를 이 뜨거운 감정은, 연모와는 다른 종류의 사랑인 것 같다(그는 내가 태어난 해에 커밍아웃한 게이다). 한국에 온 존 카메론 미첼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뜨거운 <헤드윅>의 열기에 시종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이 이상 열기는 게이나 트랜스젠더, 이민자 커뮤니티가 발달하지도 않은 한국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신기한 현상이다. <숏버스> 무대인사를 보러온 관객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었다. 디카를 들고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고생들도 눈에 띄었다. 미첼은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는 관객 앞에 “내가 무슨 브래드 피트도 아니고…” 라고 민망해했지만, 물론 그 열광은 핀업스타를 향한 그것과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 콕 집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나 자신도 그 이상 열기의 일부이기 때문에.

다만 분명한 건, 인터뷰 장소에서 직접 대면한 그는 그의 작품만큼 따뜻하고, 친절하고, 아름다웠다는 것. 미첼의 영화는 상처입은 영혼들을 다루지만, 그들의 고통을 착취하거나 관음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고통과 구원을 말하는 대신, 그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상처를 구체적으로 벌리며, 비슷한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격려의 미소를 보낸다. 그 아픔은 성정체성일 수도 있고, 어린 시절 성폭력의 기억일 수도 있고, <숏버스>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성적 교감을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고민일 수도 있다. 입에 올리기 두려운 아픔들을 향해, 그는 ‘괜찮아, 당신은 이대로 아름답고 건강하고 완전해’라고 다독여준다. 그러니 한국의 미첼 팬들은 정체성과 성에 얽힌 자신의 아픔을 차마 입에 담기가 힘들어서, 대신 미첼에게 뜨거운 열광을 보내는 걸로 치유를 얻는 게 아닐까. 그날 나는 그의 보드라운 눈웃음을 바라보며, 단단한 고민으로 성숙한 그의 가치관을 육성으로 들으며, 든든한 언니처럼 따뜻한 위안으로 마음이 충만했다. 자, 뜨거운 사랑의 고해성사는, 여기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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