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극장에 가서 만나거나 TV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영화와 만났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빛의 스펙트럼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꿈을 깨듯 잊혀지기 십상이고 한번 본 영화도 정확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것은 그처럼 짧게 스쳐가는 인상을 붙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연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싶다! 영화평론은 그래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 썼던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서라도 언젠가 혼이 찾아와 되살아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평론이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갈래 학문과 교류를 맺으며 출발점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해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기록되고 연구되고 토론의 대상이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100년 전 영화도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 살아 있는 것이며 1년 전 영화도 더이상 언급되지 않을 때 죽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영화평론가란 일종의 주술사다. 영화에 혼을 불어넣는 자 또는 영화가 살아 숨쉬게 만드는 자. 위대한 영화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게 마련이지만 그 위대함을 문자로 전파하려는 노력 없이는 영혼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미국에서 평범한 흥행작가로만 인정받던 히치콕을 서스펜스의 위대한 창조자로 입적시킨 것은 가장 유명한 예다. 앙드레 바쟁이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수잔 손택이 로베르 브레송을, 조너선 로젠봄이 마스무라 야스조를,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 야스지로를, 정성일이 임권택을, 로빈 우드가 70년대 공포영화를, 이영일이 60년대 한국영화를 재발견하게 한 것도 비슷한 예다. 그런 점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감독 오즈 야스지로>라는 책의 서문에 쓴 표현은 영화평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관한 가장 간명한 요약처럼 보인다. “이 책 <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꿈꾸는 유일한 내용은 그것이 수없이 존재하리라 희망하는 독자들이 다 읽기 전에 오즈를 보고 싶다는 욕망에 부채질되어 그대로 영화관에 달려가든지, 아니면 오즈가 상영되지 않는 것을 용서하기 힘든 부당한 사태라고 단정하고 이유 없는 울분으로 몸을 떠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번호 특집은 11명의 영화평론가가 꼽은 ‘내 인생의 영화평론가’다. 각자 다른 평론가를 꼽아야 하기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평론가 한명씩만 꼽았다고 할 순 없지만 만인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인물들로 명단을 채웠다. 만들어놓고 나니 로빈 우드나 슬라보예 지젝 등이 빠졌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들을 소개할 다른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아무튼 편집장으로서 내가 꿈꾸는 유일한 내용은 수없이 존재하리라 희망하는 독자들이 <씨네21>을 다 읽기 전에 여기 소개된 평론가들의 책을 보고 싶다는 욕망에 부채질되어 그대로 서점에 달려가든지, 아니면 조너선 로젠봄과 세르주 다네의 책이 번역되지 않은 것을 용서하기 힘든 부당한 사태라고 단정하고 이유없는 울분으로 몸을 떠는 것 외에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