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일 체제’가 보름남짓 남았다. 보름 뒤면 4월18일 영화노사간 체결된 영화산업 2007 임금협약 및 단체협약(이하 임단협)이 마침내 실행에 옮겨진다. 제작사들은 스탭들의 밤샘노동에 추가수당을 지불해야 하고, 하루치 근로가 끝나면 8시간의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40시간 연속으로 촬영했다’는 무용담 아닌 무용담은 이젠 명백한 불법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필수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등 단체협약 실행에 따라 필요한 조치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단순하다. 영화현장도 이제 보통 회사들과 똑같이 근로기준법 규정을 따라야 하는 사업장이 된다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제작 시스템을 정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변화를 긍정하면서도 일선 제작자들은 ‘7월1일 체제’에 부담을 안는 게 사실이다. 6월30일 전에 서둘러 계약을 마무리하거나 잠시 추이를 치켜보는 분위기도 있다. 참고로 임단협은 7월1일 이전에 맺은 근로계약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8월에 촬영에 들어갈 홍상수 감독의 신작 <밤과 낮>은 스탭들과 사전양해하에 모든 계약 건을 6월 안에 정리할 계획이다. 저예산영화에 해당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가제)를 제작하는 키노투 김종원 대표도 불안감을 표한다. “6월 내에 계약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잘 안 돼서, 우리도 임단협 적용 대상이 될 것 같다. 협상의 대의엔 동의하지만, (제도가 정착하는) 과도기에 괜히 시범 케이스가 될까봐 두려운 사실이다.”
거대한 변화에 대처할 만한 완충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터라 제작자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제협과 표준근로계약서 모델을 개발 중인 한 프로듀서는 “(곧 들어갈 영화들은) 어떻게든 7월1일 이전에 계약을 마쳐 일단 기존 관행을 따르려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귀띔한다. (사)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와 영화진흥위원회가 5천만원의 지원금을 내걸고 협약 실행 과정의 시행착오를 점검할 시범 케이스를 찾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실험체가 되려 나선 제작사는 아직 없다. 반면, 6월14일 제작자, 프로듀서를 대상으로 제협이 마련한 제1차 임단협 관련 현장실무자 교육은 신청 하루 만에 정원을 초과하며 마감됐다. 장동찬 제협 사무처장은 “제협에서 준비한 행사 중 이렇게 뜨겁고 신속한 반응을 얻은 예가 없었다”고 전했다. 임단협 내용과 현장 적용 실례를 숙지하지 못하면 인건비 누수와 노사 마찰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지만 먼저 나서기는 꺼리는 상황이다.
전자 출퇴근 시스템을 정비한다
노사협약 실행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작과정을 합리화하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임금과 예산 관리 소프트웨어인 CINE-ERP 프로그램 개발. 앞으로 스탭별로 집합시간을 분리하고 꼭 필요한 때만 인력을 규합하는 등, 인건비 절감을 위한 새 관행이 정립될 것이다. 이때 각자의 근로시간을 정확히 측정해 각종 수당을 정산하는 것만도 굉장히 복잡한 작업이 된다. 일반 기업에서 쓰는 전사적 자원관리(Enterpise Resource Planning)를 영화 현장에 적용한 CINE-ERP는 이런 과정을 포함해 제작현장의 계측 가능성과 효율성을 돕는다. 7월에 1차로 출퇴근 프로그램이 먼저 배포되면 스탭들은 개별 지급된 출퇴근 기록 카드를 통해 자신의 근무시간과 추가수당을 산정받게 된다.
제협은 11월 부산국제영화제 시기에 맞춰 예산관리 프로그램, 촬영 스케줄링 프로그램, 시나리오 표준화 프로그램까지 포함한 풀 버전을 공개할 계획이다. 여기 기록된 스탭들의 근무기록과 경력을 일괄적인 DB로 구축하는 구상도 나와 있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CINE-ERP 인력DB는 스탭이 경력과 실적에 따라 차등화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다. 개인 카드엔 영화인의 ‘전자주민등록증’ 이라 할 만한 정보가 집약된다. 노동 통제가 강화된다는 부작용 때문에 아직 노조쪽과는 합의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제협은 6월14일에 이어 21일, 28일에도 법안 규정에 의거한 현장 실무교육을 진행해 이해를 높인다는 방침이다. 노조쪽도 매주 수요일 스탭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한편 발빠른 제작사들 중 몇곳은 자구책을 연구 중이다.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건 제협 차승재 회장이 대표로 있는 싸이더스FNH다. 현재 진행 중인 <킬미>(가제) 등을 시험삼아 체질 개선책 마련에 나섰다. 노무 담당자가 현장에 항시 있도록 제작부를 정비하고, 포스트프로덕션에 불필요한 연출부 인력을 빼고 ‘포스트프로덕션 슈퍼바이저’라는 전문인력만 두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다. 프로덕션 전문회사인 TPS에 예산과 일정 관리를 외주로 맡긴 보경사도 7월1일 체제를 부분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이미 촬영에 들어간 신작 <걸스카우트>(김선아, 나문희 주연)는 임단협 적용 대상이 아니지만 보경사 박재현 PD에 따르면 앞으로를 대비한 “테스트”라는 의미를 두고 변화에 대비 중이다.
밤샘회의 수당, 큐시트 작성 수당도 지급?
모색과 대처가 이뤄지고 있지만 코앞에 닥친 임단협 실행 적용 과정에서 잡음이 날 우려도 분명 있다. 촬영 뒤 감독과 연출부가 갖는 밤샘회의를 노동시간으로 인정할지, 또 조감독의 큐시트 작성 업무 등 시간으로 측정하기 힘든 작업의 인정 여부 등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제작자는 연장·야간 근로에 해당하는 조명팀의 정리작업 수당이 촬영시보다 훨씬 많은 150~200% 수준이라는 모순을 지적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정리작업을 하청업체로 떼어내거나, 조명감독과 합의해 정리수당만 정액제를 적용하는 등의 유연한 합의가 필요한데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우려도 덧붙인다. 유럽 지역에서 프로덕션을 경험한 청어람 강동구 PD는 “합의를 이루는 데 들인 노고에 비해,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는 부족해 보인다”는 소감을 말한다. “영국, 스페인 등의 사례를 지켜봤지만 새로 생긴 법안이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 시행착오가 많다. 법에 규정되지 않은 부분을 어디까지 유연하게 적용할지 노사간에 합의가 더 필요하다.” 오기민 제협 정책위원장도 “단협 끝나고 할 일이 더 많다. 실무 경험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적용 과정에 불거질 빈틈들이 보일 텐데, 나서서 추가적인 협상을 진행하자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움을 표한다.
올 하반기는 악화한 투자 사정 탓에 당장 새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영화사가 많지 않다. 제작자들 사이에 불안 속에 관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스탭들도 마찬가지다. 일감이 줄었기 때문에 임단협 내용을 내 일처럼 고민하는 스탭이 아직 많지 않다. 하지만 시행착오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임단협 이후 생길 시스템의 변화에 대한 영화인들의 전망은 긍정적이다. 체계화에 따른 제작비 절감과 직업 안정화를 통한 스탭 전문화에 대한 기대도 높다. 다만 적용 단계에서 불가피한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은 부단히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발을 딛기 앞서 “10가지 사소한 잡음 때문에 힘들게 이뤄놓은 100가지 합의에 시비가 생길 수도 있다”는 한 일선 프로듀서의 지적을 새겨볼 만하다.
7월1일 체제를 앞둔 여러 가지 모색들
일일촬영계획표, 플랜 B는 필수
싸이더스FNH 윤상오 이사 “그동안 싸이더스 내부에서 지방 올로케인 영화, 액션이 많은 영화, 시대극별로 케이스 스터디를 해왔다. 앞으로는 시간이 돈이 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시나리오나 콘티 단계에서부터 계획성있게 가야 할 것이다.” 외주 비용에 거품을 쏘옥 장비, 현상 업체 등 외주업체를 선정할 때 지금과 달리 공개입찰을 거칠 예정. 잉여 인력은 최소화 어떤 현장이든 필요없는 인력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편집, 믹싱 단계에 연출부가 일없이 머무르는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단계별로 필수 인력만 계약을 맺는 식으로 변할 것이다. 촬영 스케줄링에 ‘플랜B’는 필수 여름철 장마로 촬영이 취소되거나 배우 사정으로 펑크가 나도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러니 어떤 가변적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제2, 제3의 예비 계획을 의무화할 것이다. 현장 제작부 인력에 노무 전담자 항시 배치 이젠 재무팀과 연계한 노무 담당자 없이는 현장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프로덕션 전문회사 TPS(Total Production Service) 이종호 PD(<걸스카우트> 프로덕션 담당) “이 작품은 임단협 대상은 아니지만, 시범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대 보험 적용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우리 연출 제작부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조정해보고 있다.” 제작부 출신 조감독 도입 합당한 대우를 하고 전문 조감독을 기용하려 해도 우리나라엔 그 정도 경험을 축적한 베테랑 조감독이 없다. 지금 실험적으로 제작실장 출신에게 조감독을 맡겨 감독의 연출과 현장일정과 인력 운영을 총괄하게 하고 있다. 일일촬영계획표를 한달 전에! 스탭 계약 이전에 나오는 게 최선이라 본다. 지금은 하루 전에 작성하는 게 보통이지만, 앞으론 시나리오 완고를 받으면 곧 구체적인 계획표를 작성해야 할 것이다.
청어람 강동구 PD (홍상수 감독 <밤과 낮> 프로듀서) “앞으로 현장이 좀더 영리하게 운영되야 한다는 건 감독님과 스탭들도 이해하고 있다. 모든 변화엔 불편함이 따르겠지만, 현장에 기반을 둔 창의성이 꼭 즉흥성과 딜레이에서 오는 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합리적인 제도가 인프라가 되면 그 틀 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정한 회차표를 헌법처럼! 우리 회차표와 일일촬영계획표도 외국 현장만큼 꼼꼼하다. 하지만 외국에선 이를 헌법처럼 다루는 태도가 있는다. 우리도 감독과 프로듀서, 조감독, 연출부가 상호 협의하고 컨펌하는 과정이 따르면 가변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