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6월16일(토) 밤 11시
말라르메의 장편시인 <목신의 오후>는 님프의 관능적인 육체에 매혹된 목신의 욕망과 몽상을 그린 작품이다. 드뷔시는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라는 곡을 썼다. 그리고 체코의 여성감독 베라 히틸로바는 이 곡을 재해석하여 <목신의 매우 늦은 오후>라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이 작품 역시 독신남 ‘판’의 반복되는 애정행각을 따라가며 한 남자의 겉잡을 수 없는 성욕과 판타지, 그 밑바닥에 자리잡은 생의 허무를 보여준다.
체코의 도전적인 페미니스트 감독이 이토록 남자의 욕망에 몰두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 남자와 그를 스쳐가는 싱싱한 여성의 몸들에 관한 그 수많은 영화들에 그녀가 굳이 동참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특이하게도 <목신의 매우 늦은 오후>에서 여성의 육체 혹은 젊음은 남자의 시선 안에 포섭되어 완벽히 대상화하지 않는다. 감독은 늙은 남자의 시선에 카메라의 시선을 일치시켜 여성의 몸을 함께 관음하고 향유하는 대신, 한발 떨어져서 이 남자의 시선을 냉정하게 지켜본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여성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의 흐름 앞에 무력하게 내던져진 남자의 추악함과 탐욕, 나아가 그 어떤 푸르른 생명력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시간의 공허감이다. 게다가 영화는 갑작스런 줌인과 줌아웃 같은 과감한 카메라 워킹을 통해 남자의 판타지, 혹은 그의 시선에 동화되는 관객의 판타지를 분절한다. 남자가 여자의 나신을 이글거리는 욕망으로 훑어 내려가는 순간, 카메라는 그 유기적인 시선의 흐름을 인위적인 줌의 사용으로 끊어내고 사유의 틈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남자에게 남은 것은 술에 취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로움을 쏟아내는 광기뿐이다. 그의 인생을 지배했던 쾌락에의 유혹은 나른한 권태가 되어 노년의 삶에 돌아온다. 체코의 고요하고 차분한 풍경 속에서 한때는 세상의 젊은 기운을 마음껏 섭취했던 남자가 요란한 몰락을 겪고 있다. 그러니까 <목신의 매우 늦은 오후>는 남자의 무모한 성적 판타지를 동정(?)하는 베라 히틸로바식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