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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칸영화제 결산] 루마니아, 영화의 신대륙으로 등극하다
김도훈 2007-06-14

칸을 비롯해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영화와 다양한 상업영화로 부상하고 있는 루마니아영화의 현재

루마니아는 넥스트 이란, 혹은 넥스트 코리아인가. 아직 대답하기는 이르지만 동구권의 잊혀진 국가 루마니아가 현대영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거나, 혹은 현대영화의 새로운 선수로 뛰어오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요절한 크리스티안 네메스쿠 감독의 <캘리포니아 드리밍>(Esfarit/California Dreamin’)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그랑프리를 받았으며, 지난 2004년 단편 <트래픽>(Trafic)으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카탈린 미투레스쿠 감독은 신작 <심장 모양의 풍선>(A Heart-Shaped Balloon)을 올해 아틀리에 섹션에서 선보이며 차기작을 위한 예산을 지원받게 됐다. 젊은 루마니아 감독들의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6년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12시8분 부쿠레슈티의 동쪽>은 황금카메라상을 받았고, 지난 2005년 크리스티 푸이유의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그랑프리를 낚아채며 전세계 수십개국으로 팔려나간 바 있다. 발칸반도의 동쪽 끝, 흑해 연안에 위치한 낡은 동유럽 국가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풍부한 문화적 유산, EU 가입 등이 발전의 자산

칸 현지에서 만난 미국 평론가(이자 루마니아 영화전문가) 로널드 홀로웨이는 “루마니아영화는 정말로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크리스티안 문주의 영화 같은 리얼리즘 계통의 사회물뿐만 아니라 할리우드를 모방한 장르영화들 역시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루마니아가 이른바 해외영화제용 작가주의영화만을 협소하게 생산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증명하는 작품은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그랑프리 수상작인 크리스티안 네메스쿠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다. 아만드 아상테 같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이 영화는 코소보로 향하던 미국 평화유지군들이 루마니아의 한 마을에 발이 묶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2시간45분짜리 코미디영화다. 언뜻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시끌벅적한 소동극을 연상시키지만, 쿠스투리차의 영화보다도 더욱 할리우드적으로 매끈한 서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보는 이의 눈을 잡아챌 만큼 능숙하다. 루마니아영화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네메스쿠 감독은 불행히도 지난해 8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고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주어진 그랑프리는 어쩌면 예의를 갖추기 위한 장송곡일 수도 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루마니아가 황금종려상 수상작 같은 작가주의영화뿐 아니라 잘 팔릴 만한 상업영화의 생산성 또한 갖추고 있다는 선명한 증거로서 부족함이 없다.

<라자레스쿠씨의 죽음>

<캘리포니아 드리밍>

루마니아영화의 부상은 문화적인 전통의 힘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로널드 홀로웨이는 루마니아가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가진 덕택에 풍요로운 영화적 텍스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루마니아는 3천만명의 인구를 가진 커다란 국가이며, 흑해 연안의 풍부한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북부 지방은 헝가리, 게르만, 색슨족의 문화가 다양하게 섞여 있기도 하다. 통용되는 언어가 서너개에 달하기 때문에 각 언어의 원류가 되는 문화들을 모조리 흡수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부를 지닌 루마니아는 최근 EU 가입을 통해 경제적인 발전을 가속하고 있으며, 멀티플렉스를 비롯한 영화 관람 환경이 급속하게 나아지면서 자국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 또한 늘고 있는 추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문주와 네메스쿠, 카탈린 미투레스쿠 등의 젊은 감독들이 낡은 영화 권력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루마니아의 CNC(National Centre for Cinematography)는 낡고 오래된 공산주의 프로파간다 출신 감독들의 영화에만 재정적인 지원을 퍼붓고 문주와 같은 젊은 세대의 감독들을 종종 무시해왔다. 문주는 “늙은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CNC는 젊은 감독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거의 해주지 않고 있다”며 쌓인 분노를 표출한다. 하지만 네메스쿠의 죽음이나 오래된 영화감독들의 헤게모니 장악도 젊고 의기양양한 재능들의 전진을 막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이나 <내겐 너무 멋진 서쪽 나라> 같은 작품들의 흥행성공 덕택에 광고회사나 외국 투자자들의 재정 지원이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트란실바니아영화제처럼 지난 5년간 속속 등장한 루마니아의 국제영화제들은 젊은 감독들에게 자신의 영화를 선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

젊은 감독들간의 유난스런 경쟁심리도 한몫

“계속되는 경쟁 덕택에 영화도 더 좋아진다”는 크리스티안 문주의 말처럼, 유난히 자존심 센 젊은 감독들이 국제영화제와 자국의 흥행성적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지속하고 있는 것도 루마니아영화의 밝은 미래를 가늠케 하는 요소 중 하나다. 로널드 홀로웨이 역시 젊은 루마니아 감독들의 조금은 유별난 경쟁심리를 주목한다.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의 크리스티 푸이유는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의 심사위원이다. 하지만 지금쯤 경쟁에 올라 있는 크리스티안 문주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혀 심사고 뭐고 안중에도 없을 게 분명하다.” 아쉽게도 푸이유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칸영화제에 오지 못했고, 지금쯤 본국에서 문주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지켜보며 질투심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푸이유 역시 내년이나 후내년에는 경쟁부문에 참여할 만한 걸작을 만들어 칸을 찾을지 모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영화의 신대륙 루마니아의 재능들에게 불을 질러놓았다. 당분간은 루마니아발 불꽃이 세계 영화계를 향해 멋지게 튀어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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