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960년대는 뜨겁기만 한 시대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스코트 매킨지), 사랑할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찾아 헤매는(제퍼슨 에어플레인)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클럽 ‘맥스 캔자스 시티’의 어두운 무대에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냉소적이고 전위적인 록음악 연주에 몰두했다.
반전과 평화를 목놓아 외치는 뜨거운 세계의 다른 한편에 차가운 아방가르드의 지하세계가 있었다. 실험적인 연극에서 미니멀리즘적인 팝아트까지, 60년대 뉴욕 맨해튼의 예술계는 언더그라운드의 천국이었다. 그리고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정점은 앤디 워홀이었다. ‘팩토리 걸’은 스스로 ‘공장’이라고 불렀던 자신의 창작 스튜디오 안에서 현대 예술의 혁명을 제조했던 앤디 워홀의 여자, 에디 세즈윅에 관한 영화다.
1965년,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은 파티에 들렀다가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는 자신의 스튜디오 ‘팩토리’로 에디를 데려간 앤디는 그녀에게 실험영화 주연 자리를 제의한다. 연이은 출연으로 유명인사가 된 에디. 카리스마 넘치는 록스타 빌리 퀸(헤이든 크리스텐슨)이 자기 앞에 나타나자 에디는 흠뻑 빠져든다.
<팩토리 걸>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은 6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특별한 공기를 생생히 살려냈다는 점이다. <미세스 파커>나 <캐링턴>, <폴락>이나 <바스키아> 같은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재미는 예술가 그룹의 내부를 엿보는 느낌이다. <팩토리 걸>은 워홀의 팩토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를 이방인 에디의 시선으로 매우 실감나게 스케치한다. 무엇보다 <팩토리 걸>은 사전 취재가 치밀한 영화다. 성실하고도 감 좋은 연기로 ‘패션 리더’나 ‘주드 로의 연인’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시에나 밀러의 모습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감독 조지 하이켄루퍼는 흡사 숏 하나하나를 콜라주하는 것 같은 스타일을 선보인다. 흑백과 컬러가 교차하고, 인터뷰와 신문 헤드라인과 에피소드 스케치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모던하고 경쾌한 형식은 팝아트 선구자 워홀의 주변 풍경을 그려내는 데 효율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6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특별한 공기 속 나머지 부분을 채우는 것은 에디 세즈윅이라는 뜨거워서 가련한 여인이 겪는 전락의 스펙터클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인 이 여인 수난극에서 에디는 자유롭고 방종하며 차가운 앤디 워홀의 자장 속에서 한껏 망가진다. 명성과 파티와 마약에 도취되어 솟아올랐다가 급전직하하는 에디의 삶은 파산과 실연과 절연을 통해 가능한 모든 관계에서 파탄지경에 이른다.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처참한 종말은 종교적으로까지 보인다.
<팩토리 걸>은 서술되지 않고 묘사되는 인물을 볼 때의 쾌감을 제대로 안긴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더이상 스케치되지 않고 스토리텔링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는 관성의 함정에 빠진다. 그녀의 재능에는 관심없이, 그저 위선적인 아버지와 이기적인 연인과 친구한테 철저히 착취당한 희생자로만 보려 할 때, 영화는 에디 세즈윅이 앤디 워홀의 플라스틱 세계에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유리 인형이었다고 쉽게 결론짓는다. 경쾌한 스타일과 철저한 취재로 드문 생기를 빚어낸 영화가 종착점에 이르러 게으른 인물 해석을 드러낸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쉬운’ 결론에도 불구하고, 클럽 무대에서 헤로인에 취해 벌벌 떨며 춤을 출 때,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워홀을 찾아가 악귀 같은 모습으로 악다구니를 쓸 때, 강간장면을 촬영한 뒤 물건까지 훔쳐 떠나려는 일당에게 “혼자 두고 떠나지 마”라고 애원할 때,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 수줍게 웃었던 대학 시절 사진을 보며 그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무저갱(無底坑)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에디 세즈윅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격렬하게 흔든다. 그런데 그 감정의 정체는 뭘까. 이것은 연민일까. 희생제의가 끝난 뒤 양고기를 나눠먹는 자의 알량한 죄의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