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 속 홍콩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아틀란티스나 희망봉처럼 특정한 정서의 기호다. 사연없고 치떨리는 기억 하나 없는 도시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1997년 중국 반환과 21세기 들어 홍콩을 엄습한 전염병은, 홍콩을, 뿌리 뽑힌 자의 만성적 고독과 사춘기적 불안을 도맡아 상징하게 만들었다. 유위강, 맥조휘 감독은 그 이미지에 아예 ‘무간지옥’, ‘상처받은 도시’라는 이름을 붙여 영화 제목으로 앞세웠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의 영어 제목은 ‘고통의 고백’(Confession of Pain)이다. 고통받는 자들은 이번에도 두 남자다. 양조위와 금성무는 1995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나진 않고 따로따로 방황했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에서도 둘의 성격은 <중경삼림>의 캐릭터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12년 전 연인을 떠나보내고 한밤중 스낵 코너에 말없이 들러 요기를 하던 양조위는, 여기서 속내를 알 수 없는 치밀한 경찰반장 유정희다. 그때 쓰러질 때까지 달리고 먹으며 실연과 싸웠던 금성무는 알코올로 몸을 학대해 가며 나쁜 기억과 씨름하는 전직 형사 아방이다.
영화는 3년 전 경찰들의 새해맞이 파티에서 시작된다. 연인에 대한 고민에 빠진 젊은 형사 아방에게 유정희 반장은 위스키의 쓴맛을 가르쳐준다. 둘의 대화는 용의자의 소재를 알리는 무전으로 끊기고 형사들은 범행현장을 급습한다. 유정희는 여자를 야비하게 폭행한 범인을 팀원들의 묵인 아래 냉혹하게 구타한다. 이 남자의 흉중에는 차갑게 식은 분노가 있다. 얼마 뒤 지친 몸으로 퇴근한 아방은 손목을 끊고 죽어 있는 애인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는 경찰을 떠난다. 3년 뒤, 아방은 위스키를 연신 들이켜는 사립탐정으로 변했고 경찰 중견으로 자리잡은 유정희는 종군기자 출신 아내 숙진(서정뢰)과 달콤한 신혼생활 중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유정희의 부유한 장인과 집사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숙진은 누군가에게 미행당하고 있다는 공포에 쫓긴다. 남편을 포함한 경찰의 수사에 불신을 품은 숙진은 아방에게 조사를 의뢰하고, 사건을 더듬어가던 아방은 옛 동료 유정희를 가리키는 단서 앞에서 갈등한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는 살인범의 정체를 초반에 누설한다. 그러니까 미스터리의 요체는 ‘왜?’와 ‘어떻게?’다. 그러나 유정희 장인이 살해당한 방법은 기괴하거나 교묘한 구석이 없다. 남는 문제는 결국 동기다. 이 동기가 관객이 영화에서 공평히 제공받지 않은 정보-은밀한 과거-에서 비롯될 경우 그것은 이야기의 반칙에 해당된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의 각본은 그러한 부담을 감수한다. 추리의 묘미보다 인물을 탐구하는 데 영화의 목적이 쏠려 있다면 이 반칙은 용인될 수 있다. 하지만 <상성: 상처받은 도시>의 선택은 어정쩡하다.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구성의 기술도 미흡하다. 궁금증을 안겨주고 그것을 해결하는 시간이 너무 짧으면 맥이 빠지고, 너무 길면 애초 문제가 뭐였는지 시들해지는 법인데 <상성: 상처받은 도시>는 그 타이밍을 잃는다. 영화 막바지 15∼20분 동안 ‘고백’의 형식으로 제출되는 해답은 관객이 생각하고 반응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다. 유위강의 카메라는 멋에 민감하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의 홍콩은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같은 광채를 낸다. 맨션은 맨션대로 뒷골목은 뒷골목대로 근사하다. 양조위는 쓸쓸하고 금성무는 역동적이며 서기는 사랑스럽다(서기의 캐스팅은 배역에 비해 과하다). 부족한 것은 오히려 ‘상처’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는 할리우드 리메이크가 예약돼 있다. 흥미로운 전제와 인물 구도를 갖춘 한편, 스릴과 감정을 유도하는 회로에 약점이 보이는 만큼, 오히려 리메이크 제작진의 재해석에 기대가 간다.
<상성: 상처받은 도시>에서 복수의 과정은 참혹하고 결과는 참담하다. 시간과 함께 상처에 새로 돋은 살을 깨닫지 못한 복수는 자해로 귀결되고 만다. 위스키의 기원을 일러주는 유정희의 대사가 교훈적이다. “술은 원래 소독제로 썼대. 그런데 세상에 소독할 게 그리 많은가. 5년쯤 뒀다 마셔보니 맛이 기막혔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