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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한국영화 하면 무슨 장르?

“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게. 그렇게 끔찍하진 않아. 사람들이 말하듯, 이탈리아에선 보르지아 치하 30년간 전쟁, 테러, 살육, 학살을 겪었지만, 미켈란젤로, 다 빈치, 르네상스를 만들었어. 형제애를 가진 스위스에선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졌지. 그런데 그들은 뭘 만들었나? 뻐꾸기 시계라네. 잘 가게.” 캐럴 리드의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오슨 웰스가 내뱉은 말이다. 곧잘 명대사로 인용되는 문구인데 오래전 머릿속에 새겨진 이후로 스위스 하면 뻐꾸기 시계를 연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스위스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반발할 만한 내용이겠으나 외부에서 본 스위스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스위스가 뻐꾸기 시계라면, 홍콩은 누아르와 무술영화다. 청소년기를 홍콩영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세대에겐 보편적인 일이다.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알려졌지만 <무간도>나 <묵공> 같은 영화를 볼 때면 “썩어도 준치라더니”하며 감탄하게 된다. 자본과 인력이 빠져나갔지만 홍콩영화의 저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홍콩이 누아르와 무술영화라면 한국은 무엇일까? 지난 10년간 한국영화를 돌아보면 관객 점유율 상승으로 대표되는 급속한 성장에도 딱히 답을 내기 어렵다.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박찬욱 등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감독들도 있고 <괴물>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등 장르영화 걸작도 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산업의 총체적 위기가 드러난 지금은 특히 그런 허전함이 크게 느껴진다. 작금의 하강국면을 반전시킬 한국영화의 저력이 어디에 있나, 물었을 때 재능있는 인력이 있다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 힘든 형편이다. 어떤 면에선 당연한 일이다. 90년대까지 쇠락하던 산업이 10년 만에 대단한 기초를 닦으며 성장할 순 없었을 테니. 한국영화의 산업적 성장은 대체로 ‘맨땅에 헤딩’하는 시도를 통해 이뤄졌다. <쉬리>에서 <괴물>까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노력은 번번이 투자 단계부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않으려는 감독들과 모험에 도전하는 제작자의 의기투합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맨땅에 헤딩해서 조금씩 일구었던 장르영화의 영역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아류작만 양산하고 있는 한국 호러영화를 보면 이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이나 배급구조의 문제 이전에 창의성의 고갈이 눈에 띈다는 것이 최근 한국영화 위기에서 심각한 점이다.

이번호에 칸영화제에서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칸 마켓 분위기가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한국영화를 파는 것보다 외화 수입이 성황이라는 얘기다. 한류 특수가 사라지고 독창적인 상업영화가 별로 없는 상황의 방증일 것이다.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 앞에 잔뜩 움츠러든 국내 상황을 보노라면 칸 마켓의 쓸쓸한 분위기를 멀리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0년 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분위기를 돌파하는 데는 역시 모험적이면서 창의적인 기획이 큰 힘이 됐다. 이번호 특집으로 ‘장르영화를 개발하라’고 내건 것은 그런 참신한 시도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한국영화가 침체하는 와중에도 다시 꽃이 필 수 있는 든든한 뿌리를 내리기를 소망한다. 누군가 그런 저력을 목격하며 “썩어도 준치라더니”하고 내뱉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