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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봉건사회와 싸우는 러브스토리

<황진이>가 치맛자락 속에 꼭꼭 숨겨뒀던 구슬을 세상에 던져보였다. 기획 단계에서 완성까지 무려 4년, 촬영에만 7개월을 쏟아부은 <황진이>(6월6일 개봉)는 그동안 속살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은채 침묵으로 애간장을 녹여왔다. 북한의 문인으로는 처음으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를 원작으로 삼았고, 비록 성사되진 못했으나 개성 현지 로케이션 촬영을 추진했으며, 송혜교라는 스타를 끌어들이면서 사회적인 이목을 끌었던 사극 <황진이>는 같은 인물을 다룬 드라마가 먼저 방영되면서 더욱 호기심을 부추기기도 했다. 5월23일 오후 2시 서울극장에서 공개된 <황진이>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양반과 천민 사이에 놓인 황진이의 삼각관계를 통해 시대를 드러내보이겠다”는 장윤현 감독의 말대로, 윤리에 맞서 욕망을 사르고 새 세상을 꿈꿨던 한 여인의 삶을 멜로드라마라는 그릇 안에 담아놓은 영화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궁금증을 해소할 수는 없겠지만, 먼저 국문학을 전공한 영화평론가 김지미의 <황진이> 론과 “데뷔할 때 보다 더 떨린다”는 장윤현 감독의 인터뷰를 내놓는다.

죽은 여성을 되살려내는 일은 남성을 되살리는 일보다 자유롭다. 여성의 삶이 문자를 통한 기록으로 권위를 얻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삶은 풍문처럼 흘러들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낭만적으로 미화되거나 거칠게 비하된다. 말이 파고들 틈이 많다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며,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무한대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 몇줄의 역사적 기록이 <대장금> 같은 장편드라마를 만들어내기도 하지 않는가. 모든 사극의 숙명이 그러하겠지만 사실의 기록이 거의 텅 비어 있는 역사 속의 여성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하는 일은 과거를 복원하기보다는 현재를 반영하는 데 더 큰 의의를 갖는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21세기적 감수성으로 되살려내면서 역사를 탈탈 털어버린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였으리라.

황진이의 시구들은 행간 걸침과 중의적 표현으로 절묘한 언어적 감각을 자랑한다. 시 자체의 언어적 구조뿐 아니라 숭앙과 멸시를 동시에 받는 기생이라는 직분과 여러 계급에 걸쳐 있었던 그녀의 삶은 ‘황진이’라는 이름 안으로 모순적인 의미들을 동시에 밀어 넣는다. 진사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라는 출생신분은 (실제 당시 양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와 상관없이) 양반으로서의 품격과 천민으로서의 설움을 동시에 환기하며, 자신의 색(色)을 무기로 남성을 주무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적 노리개일 수밖에 없는 기생이라는 신분은 그녀의 권력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선시대 여성이 겪어야 했던 질곡을 몸으로 체현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향유한 독특한 지위를 가진 여성임이 분명하다. 이런 요소들이 ‘황진이’를 다양한 시대와 장르 속으로 끊임없이 소환하는 빌미가 되며, 창작자들에게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을 조롱하는 여자, 황진이

2007년 황진이가 스크린에 등장하기 전 만날 수 있는 가장 최근 버전은 김탁환의 <나, 황진이>를 원작으로 삼은 드라마 <황진이>였다. 그 속에서 그녀는 하지원의 똑 부러진 연기를 통해 예인(藝人) 황진이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기생을 현대의 매매춘 여성으로 곧바로 치환할 수 없는 독특한 자질은 그들이 일종의 종합 예술인었다는 사실이다. 춤과 노래 그리고 문(文)을 갖춤으로써 그들은 해어화(解語花)라는 별칭을 얻었었다. ‘꽃은 꽃이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그 이름에는 그들의 존재를 차별화하여 한껏 치켜주는 듯하면서도 그녀들을 꺾어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남성들의 음흉한 욕망이 숨겨져 있다. 드라마 <황진이>가 기생 황진이에게 씌워진 그런 욕망의 시선을 벗겨내는 지점은 바로 예술가로서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획득해나가느냐에 있었다. 기방은 예술적 공동체로 형상화되고, 행수 기생은 예술적 스승이 되며, 그녀가 좌절된 사랑에서 받은 상처는 예술혼으로 승화되었다.

장윤현 감독의 새 영화 <황진이>는 다른 길을 걷는다. 이 영화는 별당아씨 황진이는 어떻게 죽고 기생 명월이가 어떻게 태어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한 인간이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아를 버리고 완전히 다른 자아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상을 버리고 다른 세상에서 살겠다는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죽음과 삶, 갇힌 공간과 열린 공간, 표면과 이면이라는 분명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간의 선택과 갈등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원작이 된 홍석중의 <황진이>가 조선시대라는 화석화한 시간을 현재적으로 사유하는 시선과 이 시대에 황진이를 되살려내는 방식에 가장 많이 기대고 있는 지점이다. 주어진 길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진이에게 어느 날 벼락처럼 다가온 선택의 순간, 그것은 그녀가 갇혀 있던 효자정문과 풍요로운 별당 그리고 가식뿐인 관계라는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며 자신의 운명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하는 형벌 같은 자유를 감내해야 하는 찰나다.

별당아씨 진이를 담장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그녀의 첫 남자이자 기둥서방인 놈이다. 명월이와 놈이의 사랑은 이 영화에서 서사의 기본축을 형성하며 모든 갈등의 근원인 동시에 구불구불 얽히고설킨 덩굴 같은 인연의 끈들을 풀어내는 간명한 해답이기도 하다. ‘자신이 담을 넘어 아씨에게 갈 수 없다면, 아씨가 담을 넘어 자기에게 오기를 원했던’ 놈이의 소박한 소망은 진이를 명월로 만들고 순수한 첫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혼자 소유할 수 없는 여인에 대한 부질없는 욕정으로 전락시킨다. 진이는 놈이에게 육신을 주는 순간 사랑과 육체적 결합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진이에게 남은 것은 그것들을 실컷 비웃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이 선택이 옳았고, 자신이 떠나온 곳이 낙원이 아님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길뿐이었다.

명월이가 류수 사또와 함께 성인군자연하는 선비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속내를 까발리는 짓궂은 장난을 벌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진정 완벽한 성자도 영웅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한 인간의 단면만을 극대화하여 신비감을 조성한 허위라는 데 동의한다. 스스로의 절개를 높이려던 벽계수를 골탕 먹이는 데까지는 그들의 연합전선이 공고해 보였다. 그러나 명월이가 서화담을 만나 그의 품성에 진정한 감화를 받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으나 그를 둘러싼 사회적 지위가 존재방식을 결정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그 관계는 조금씩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류수 사또가 놈이에게 명월을 재물로 삼아 비열한 힘겨루기 시작하며 놈이가 이끄는 화적떼가 성행하는 근원을 보지 않고 현상을 무마하고 자기 본위로 사건을 처리하려고 하면서 명월이 류수 사또에게 가졌던 연대감은 적대감과 경멸로 전환된다.

단아한 멜로드라마의 장단

영화 <황진이>는 원작의 풍성하고 다단한 가지를 쳐내고 진이와 놈이의 통할 듯 말 듯한 사랑과 끊일 듯 끊이지 않은 인연을 강조하면서 단아한 멜로드라마로 완성되었다. 단아함은 이 작품이 갖는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생 황진이를 둘러싼 사내들의 애욕이 질척거리지 않고 드라이하게 처리되어 그녀의 고고한 자태가 한층 두드러지도록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작의 걸쭉한 입담과 오밀조밀한 재미들을 차단해버리며 관객이 인물의 내면에 도달하여 공감대를 형성할 여유를 마련하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놈이와 명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잔을 나누며 그동안의 정회를 토로하는 장면은 차근차근 쌓아둔 정회가 폭발하는 지점이 되기보다는 선행하는 서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했던 마음을 급작스럽게 고백하는 순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놈이는 황진이의 사랑을 받은 유일한 남성이기도 하지만 다른 여인네들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명월이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시대와 성(性)이라는 벽을 넘어 행동할 수 있는 인물이다. 명월과 놈이는 사랑하는 연인인 동시에 내면적 각성과 외부 세계에 대한 행동으로 결합한 하나의 짝패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사랑은 남녀간의 애틋한 이성애이자 동시에 동일한 주체가 구현하는 다른 자아에 대한 자기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놈이가 자신에게 품은 마음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이 아니라 힘에만 의지하기를 선언했던 명월이 놈이에게 매료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는 다소 무심하다. 별당아씨 진이가 죽었음을 선언하고, 명월이로만 살기로 한 그녀가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첫사랑의 순정이 자신의 옆을 언제나 지켜줬다는 사실을 복기함으로써 그것을 사랑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관객이 그들의 감정에 젖어들 틈도 없이 언어로써 설득하려 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 <황진이>가 들어선 길

화려한 문양이 수놓인 검은빛의 한복과 한껏 부풀린 가채와 무너질 듯 쌓아올린 가구들 틈에 갇힌 <황진이>가 유미주의의 재물이 된 근간의 사극에서 얼마나 독립된 길을 걷고 있는지를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많은 사대부와 관료들의 거짓된 사랑을 거부했던 명월이가 놈이라는 민중 속에서 더 큰 세상을 발견하도록 함으로써 영화 <황진이>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해 기록된 역사, 통치자의 역사 이면의 다른 국면들을 포착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전의 황진이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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