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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의 가렐식 번역 <와일드 이노선스>

냉정하게 자신의 삶을 되감을 수 있는 대가의 시선을 느껴보라

사적 영화(personal film), 포스트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필립 가렐의 영화를 가리켜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함께 포스트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장 외스타슈가 단 세편의 장편영화를 끝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빈자리까지 채우며 고군분투하는 이가 바로 필립 가렐이다. 가렐은 자신의 사적 경험과 기억을 통해서 삶의 본질을 포착하지만, 그 삶을 낭만화된 추억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건조하다 못해 냉정하다. <와일드 이노선스>는 필립 가렐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적 영화로 불리는 가렐 영화의 특성과 특유의 건조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가렐은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연인이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니코를 떠올렸을 것이다. 마약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니코에 대한 사랑과 기억에,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현대영화에 대한 성찰적 시선의 무게가 더해지는 순간, <와일드 이노선스>는 필립 가렐 특유의 서명이 새겨진 작품으로 완성된다.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모제(메디 벨라 카셈)는 모델 출신의 유명 배우였던 연인의 죽음을 맞는다. 헤로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를 기억하며 모제는 영화를 준비하는데, 마약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한 여인의 삶을 기록하는 이 작품의 제목이 바로 <와일드 이노선스>다. 이 ‘영화 속 영화’는 마약에 빠져 세상을 떠난 한 여인을 애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헤매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모제는 우연히 만난 루시(줄리아 포레)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려 하지만, 정작 모제는 제작비조차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던 중 모제는 샤스(미셸 슈볼)라는 부호를 만나게 되는데, 샤스는 제작비를 지원하는 대가로 마약을 운반해달라는 요구를 한다.

<와일드 이노선스>는 <파우스트>의 가렐식의 번역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옛 연인의 애도를 위해 준비한 영화, 그러다 새로이 사랑에 빠지게 된 한 여성, 그녀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 위한 악마와의 거래, 그리고 예정된 자멸. 하지만 이러한 드라마적인 설정에도, 가렐의 시선은 모제와 루시가 스스로의 삶을 황폐화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따라갈 뿐이다. 모제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영화를 촬영하게 되지만, 그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자신의 형상을 그려나가는 것과 비례하여 두 사람이 소통하던 통로는 점차 폐쇄되어가고,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다. 가렐은 모제를 통해 예술적 숭고함과 비정한 현실 간의 거리감 속에서 해매야 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사적’ 고백을 읊조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와일드 이노선스>에서 가렐의 대가다운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는 루시와 모제의 자멸을 동정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삶을 시궁창에 몰아넣는 그 어리석음을 섣불리 비판하지도 않는다. 롱숏의 거리감과 흑백 영상의 건조함은 가렐의 냉정한 시선을 표현하는 궁극적인 힘이다. 또 이는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가렐의 능력이기도 할 것이다.

모제는 루시의 막막한 삶을 구원함으로써 옛 연인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서 벗어나고자 했겠지만. 긴 여행 끝에 그는 자신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모제는 (첫 장면에서) 창밖의 황폐한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으로 (영화 엔딩에서) 루시의 삶의 종언을 바라봐야만 한다. 혹, <와일드 이노선스>의 첫 장면을 엔딩 다음에 갖다 붙인다고 해도 영화의 내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와일드 이노선스>는 도돌이표를 간직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모제는 한 제작자의 방에서 반복해서 원을 그리며 걷는다). 가렐이 목적과 성취를 엇갈리게 하는 운명의 힘을 도돌이표의 폐쇄적 순환운동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힘은 무척이나 강렬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내 언어의 힘은 너무도 초라하다. 질 들뢰즈의 말처럼,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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