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역시 ‘영신’(공효진)은 거짓말쟁이였다.
아무리 청정한 푸른도에서 나고 자랐어도 그렇지, 에이즈에 걸린 ‘쪼매난 메주 딸’(서신애)이랑 치매를 앓는 ‘미스터리 할아버지’(신구)랑 사는 가난한 싱글맘인 그가 팔자 타령 한번 입에 담지 않고 주변의 악의와 공격을 스펀지처럼 슥삭 빨아들이며 ‘고맙습니다’를 외친다는 것은 ‘현실성 빵점’에 가깝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표방한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누구보다 이 영신이라는 인물은 동화적이다. 똘똘한 딸내미에게 ‘뻥 까지 마’라며 의심을 사도, 도시에서 온 의사 출신의 고약한 사랑방 손님인 기서(장혁)에게 ‘빙신 같이…’라는 안타까움을 사도 싸다.
그런데 박해받는 예수를 잉태한 성모마리아 같던 영신이 마침내 정체를 고백했다(4월26일 방송). 자신이 무생물이란다. 사람도, 여자도 아니란다. 그냥 돌이고, 돌이라서 감정도 없으니까 불쌍해하지도 말고, 좋아해주지도 말고, 키스해주지도 말란다. 영신은 수줍게 사모하기 시작한 기서와 논두렁가에서 입을 맞춘, 잠시나마 행복해해도 괜찮을 순간에 하필이면 그렇게 자기를 선언했다.
‘나 괜찮아’를 입버릇처럼 내뱉어온 영신은 무생물이라는 어불성설의 거짓말로 실은 상처투성이인 속내를 투명하게 들키고 말았다. 논두렁가에서 불편한 자세로 키스하기 직전 정자에 나란히 앉아 편하게 입을 맞댈 기회가 있었건만, 미수에 그쳤던 기서의 행동이 혹시 전염병 세균처럼 거리를 두는 동네 사람들처럼 자신을 두려워해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유치하게 샐쭉해하며 속상해할 줄도 아는, 보통 인간이었던 것이다.
뚜껑을 따기 전에는 이른바 ‘PPL 거리’도 마땅히 없는 섬마을을 배경으로 천사들의 합창을 들려주는 이 드라마가 과연 통할까 싶었다. <상두야, 학교가자>를 시작으로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죽일 놈의 사랑>까지 ‘주인공 줄사망’의 멜로로 눈물을 뺀 이경희 작가와 맑은 국물의 예쁜 로맨스를 우려낼 줄 아는 <단팥빵>의 이재동 PD가 손을 잡았고, 군대에서 돌아온 오빠(장혁)도 나오지만, 일단 포털사이트의 주요 뉴스에 등재되기에는 곤란할 만큼 제목부터 얌전했다. 그럼에도 신선한 장르(KBS2 <마왕>), 비교우위의 캐스팅(SBS <마녀유희>) 등과 대결해 동시간대 1위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의 그물망이 제법 넓고 튼튼함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천상의 천사들이 아닌 생생한 육질을 드러내는 인간들의 담담한 구원 이야기가 각성과 반추와 치료의 심호흡을 유도하고 있어서일지 모른다. 영신을 비롯해 유일한 안식처인 연인을 하늘나라에 떠나보내고 하얀 가운을 벗어던진 채 섬에 온 기서나, 영신의 첫사랑인 석현(신성록)이나 모두 자신들의 특별한 사정을 유난스럽게 티내지도, 고상하게 참지도 않는다. 벼랑 끝에서도 눈물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는 듯 까치발로 버티기를 하다가 술을 진탕 들이부어 망각의 안락함에 기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준 뒤 짓궂게 찰싹 그 위를 때리는 장난도 쳐보며 자기를 지키고 상대를 보듬는다. 감정에 질척거리지도, 세련된 ‘쿨’함을 가장하지도 않는 딱 37.5도의 체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잘나가는 도시남들에게 산소호흡기를 대주는 영신은 성스러운 모성애나 꿋꿋한 캔디 정신과는 다른 천진함으로 강함과 여림의 양면을 다 드러내며 눈가에는 눈물을, 입가에는 웃음을 자꾸만 새긴다. 또 위선과는 다른 바보 같은 선량함이 똑똑한 체, 강한 체, 차가운 체하며 자기를 방어하는 기술보다 한결 나은 방법임을 알려준다. 거창한 무엇이 없어도 세상의 중심에서 가족, 이웃, 사랑하는 사람 등과 같이 ‘살아낸다’는 것의 고마움을 일깨우는 이 드라마는 인간과 세상사에 삐딱한 고수급의 비관론자마저도 착하게 설득하는 힘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