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포레스트 지음 | 열림원 펴냄
‘옛날 옛적에…’라는 말에서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버릇을 지닌 독자에게, <영원한 아이>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 될 수도 있고 또한 가장 아름다운 꿈이 될 수도 있다. <영원한 아이>는 사실 그 해피엔딩의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고 예쁜 딸을 낳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세살 난 딸 폴린이 악몽에서 깨어나 눈물을 쏟는다. 설마설마했던 딸의 증상은 골수염이 되고, 마침내 골육종이라는 악성 종양으로 밝혀진다. 그곳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명료하고 잔인한 동화, 기괴한 채색삽화들이 들어 있는 전설이 된다.
불치병에 걸린 딸과의 마지막 나날을 그린 <영원한 아이>는 투병기가 아니다. 폴린은 흰 가운을 입은 아줌마가 ‘작은 사진들’을 찍고, 때로 기계가 없어서 다른 병원에 앰뷸런스를 타고 가 ‘소리를 내는 사진들’을 찍기도 하지만, 죽음이 삶을 좀먹는 매 순간의 고통과 슬픔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슬픔의 세계에서 아이는 계집아이의 소심함을 버리고, 더 큰 자신감, 쾌활함, 사회성을 드러낸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나날을 보내지 않는다. 아빠는 일터나 카페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전화통을 붙들고 오랜 친구들에게 슬픔을 하소연하지도 않는다. 대신 부모는 폴린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자 세상에서 유일하게 어린이로 남은 어린이 피터팬에 관한 이야기를 각색해 들려준다. 아빠는 상상의 나라라고 불리는, 날아서만 갈 수 있는 신비로운 세상을 만들어내 아이에게 들려준다. 폴린은 부모가 방을 떠난 직후 방을 찾아온 피터팬을 만난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의 글들 속에서 죽음의 순간을 돌이키면서, 삶과 죽음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잠이 든 다음에 훌쩍 날아오를 일을 기대하는 아이 앞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진다. 그 누구도, 삶의 이편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인간의 가장 멋진 발명품? 그것은 반론의 여지없이 모르핀이다. 질병의 끔찍한 작업을 한 순간만이라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놓겠다고 마음먹을 때, 그것은 화학적으로 보장되는, 긁어대고 삐걱거리고 절규하는 살의 망각, 불면의 공포 속에서 제공되는 숙면, 고통을 덮는 하얀 장막이다.” 하지만 <영원한 아이>는 고통으로부터 도망가지 않는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낙원을 보여준다. 절규하는 살의 망각, 불면의 공포에서 오롯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순간을. 그래서 예정된 사멸이 미래를 낳고, 피터팬은 죽은 아이들을 데리고 깊은 밤을 날아간다. 필립 포레스트의 <영원한 아이>는 페미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