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항상 ‘<인어공주>의 박흥식이 아니라…’라는 단서 조항을 달아야 했다. 2005년 <역전의 명수>를 내놓을 때만 해도 박흥식 감독은 그저 그런 상업영화 감독 중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그의 데뷔작을 너무 쉽게 ‘그냥 코미디’ 혹은 ‘그저 상업영화’로만 간주하고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경의선>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의 두 번째 영화는 적은 예산으로 만든 소품 느낌의 영화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붙드는 요소가 풍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박흥식’ 또는 ‘박곡지 편집기사의 남편’이라는 호칭 대신, ‘<경의선>의 박흥식 감독’으로 불릴 그를 만나 영화와 삶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었다.
-<경의선>은 제작이 끝난 지 꽤 오래됐는데 뒤늦게 개봉을 하는 심정이 남다르겠다. =영화는 지난해 부산영화제 시기에 맞춰서 마무리지었다. 사실 겨울 느낌의 영화라서 개봉은 겨울에 했으면 했는데, 5월으로 잡혀서 봄 분위기로 포스터도 다시 찍었다. 어쨌건 개봉을 하는 심정은 행복하다. 사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작업한 일 또한 모두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경의선>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2005년 부산영화제에 갔다가 영화진흥위원회와 전라북도가 4억원 규모의 HD영화 지원제도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해 4월 <역전의 명수>를 개봉한 뒤라 새로운 시나리오를 여기저기에 돌리고 다른 기획안도 만들고 있을 때였는데, 불러주는 영화사가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하고 공모 준비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대에 자살하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두 남자가 자살을 포기하고 돌아나오면서 이야기를 하염없이 한다는 설정이었다. 이것을 기본 틀로 삼아 기관사와 독문과 시간강사의 이야기를 꾸몄다. 여자 캐릭터를 독문과 시간강사로 삼은 것은 내가 독문과를 나와 아는 게 있었고, 경의선이란 공간이 남과 북이 교차하는 곳이니까 비슷한 역사를 가진 독일과 관련을 맺을 수 있겠다 싶었다. 독일 관련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기관사로 설정한 이유는.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관사들이 받는 상처가 엄청나다. 기사도 많이 봤다. 하여튼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는 남자의 상처가 여자의 상처보다 훨씬 더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2년 정도 유학을 했는데, 한 케이블TV가 정규방송을 끝내면 베를린 외곽을 도는 전철의 기관실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지하궤도를 하염없이 보여주었다. 그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던 것 같다.
-경의선이라는 공간에서 연상되는 남과 북의 문제뿐 아니라 계층 또는 계급적인 문제를 아우르려 한 것 같다. =영화 후반부에 가면 여자가 남자를 감싸주잖나. 거창하게 말하면 신영복 선생님이 요즘 말씀하시는 ‘하방연대’ 같은 것이다. 물론 기관사와 대학강사의 계층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을 감싸안아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 감싸안는 행위 자체로 여자는 스스로의 상처를 이겨낸 것이고, 남자는 다시 자기 자리로 복귀할 수 있다. 남북문제도 마찬가지 같다. 독일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독일의 경우 우리보다 분단 상황도 심각하지 않았고, 극복도 빨리 됐지만 아직도 통일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한다. 만수(김강우)가 한나(손태영)에게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전차 기사를 하겠다”고 말하는 대사도 있는데, 우리도 통일이 갑자기 닥칠 수 있으니 미리 감싸안는 자세를 갖춰야 할 것 같다.
-저예산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전체 예산은 얼마나 들었나. =전체 예산은 안 밝혀졌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얼마가 들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저예산 예술영화, 지루한 영화라는 고정관념으로 판단할 것이다. <경의선>의 경우 결과는 20억∼30억원 들인 영화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김강우, 손태영이라는 스타 배우가 출연해줬다. 게다가 KM컬쳐라는 좋은 회사가 공동제작사로 나서서 홍보까지 맡아줬다. 또 이 영화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모두 충무로 A급 스탭들이다. 그건 아무래도 아내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박곡지 기사의 힘인 것 같다. CG며 특수효과며 모두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했던 분들이다. 감독만 이름이 떨어지지, 나머지 스탭은 화려하다. (웃음)
-두 주인공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영진위-전북의 시나리오 공모 결과는 2005년 12월인가 발표됐다. 겨울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 3월 전까지는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 혼자 잠정적으로 촬영 시작일자를 2월1일로 못박았다. 처음에는 알려진 배우를 쓸 것이란 기대가 없었다. 12월 중순부터 배우를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희한하게도 배우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지명도가 높은 배우들에게서 출연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들어오기도 했다. 결국 캐릭터의 이미지와 스케줄에 맞춰 김강우와 손태영으로 결정했다. 그 둘에게는 참 고맙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경의선>이 행복했던 또 다른 이유는 배우들의 적극성이었다. 만수와 한나가 임진강역에서 내려 걷는 장면의 리딩을 해야 하는데, 너무 길고 해서 그냥 리딩을 해선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영화에서처럼 정말 두 배우를 임진강역에 데려가 걸으면서 대사 연습을 했다. 그때가 영하 8도였는데 말이다.
-한나 캐릭터는 본인에게서 많이 비롯됐다고 들었다. =영화 속 한나처럼 나도 실제로 서베를린 북서쪽 외곽에서 살았다. 한국 간호사에게서 병원 기숙사를 얻어서 지냈는데, 그 바로 뒤쪽이 동독 지역이었다. 그리고 기숙사 욕조에서 혼잣말을 했던 것도 나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까 혼잣말을 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한나의 모델이 본인이었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감독 자신의 계급적 반성을 담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80년대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 감성적으로 그런 의식이 잠재돼 있는 것 같다. 한나가 만수를 끌어안는 장면은 아까 말했듯 ‘하방연대’와 비슷한 개념이다. 사실, <역전의 명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업영화다 보니 의미를 교묘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명수와 현수는 쌍둥이로 같이 태어나 자라면서 계급이 달라졌고, 두명의 오순이 중 한명은 창녀, 한명은 서울대를 나온 여성이다. 나중에 하층계급의 명수와 상류계층인 오순이가 결혼하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목은 안 읽어주더라. 물론 그것을 잘 안 보이게 한 내 탓일 거다. 그래도 보통 사람 중에는 오히려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더라.
-눈이 쏟아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눈오는 날 찍은 것인가. =기차가 달리는데 눈이 내리는 장면은 CG다. 한나와 만수가 임진강역 앞에 서 있는 장면에서는 바닥에 솜을 깔았다. 그리고 둘이 걸어가는 장면은 산정호수 주변에서 찍었는데 도무지 솜으로는 해결이 안 됐다. 그래서 스키장에서 쓰는 강설기를 빌려 눈을 뿌렸다. 그 기계가 영하 3도 이하에서만 작동한다는데, 그때가 3월이라서 간신히 찍을 수 있었다.
-예산의 한계 때문에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 =그런 것은 없다. 만약 예산이 더 있었으면 교수 방이나 한나 방을 세트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세트는 모텔 내부뿐이다. 교수 방은 실제 아는 독문과 교수의 방에서, 한나의 방은 복층 오피스텔을 섭외해서 촬영했다. 그 안의 책과 책장도 대부분 내 것이다. 촬영감독도 책을 가져오고 조명기사는 집에 있는 탁자를 가져와서 찍었다. 어쩌면 느낌은 세트에서 촬영한 것보다 더 리얼했을 수도 있다.
-개인 이력이 흥미롭다. 서울대 독문과를 나와 연출부를 거쳐 유학을 갔고, 다시 돌아와 감독이 됐다. 대학 시절부터 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것인가. =애초 헤르만 헤세와 전혜린을 좋아해서 독문과에 갔지만, 80년대 대학 분위기에선 헤세는커녕 H자도 꺼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 70년대와 80년대에는 쟁쟁한 소설가들이 많았잖나. 그들의 글을 보면 나는 절대로 그렇게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대학 4학년이 됐는데, 학교에서 <정복자 펠레>를 상영했다. 정말로 축구선수 펠레 이야기인 줄 알고 그냥 시간이나 때우자고 봤던 거다. (웃음) 그런데 깜짝 놀랐다. 영화가 이런 세계를 이렇게까지 다루는구나 하는 깨달음에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데미안>을 본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얼마 뒤에는 <아빠는 출장중>을 보고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보다는 그래도 영화 대본이 낫지 않겠냐고. 그래서 졸업한 뒤 영화계로 들어가게 됐다.
-대학도 늦게 간 편이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어느 날 자퇴를 했다. 학교가 뭔데 생활기록부 같은 것에 가나다를 매겨서 평생 간직하나 이런 생각을 했다.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고모님이 살고 계신 민통선 안쪽 마을에 들어가 2년 동안 머물면서 농사도 짓고 책도 읽는 생활을 했다. 그곳도 <경의선>에 나오는 임진강역 부근인데, 거기와 뭔가 인연이 있었나보다. (웃음) 결국 남들보다 3년 늦은 84년에 대학을 갔다.
-대학 졸업 뒤에는 어떤 일을 했나. =1990년 졸업하자마자 충무로로 나왔는데, 서른 가까운 나이라 연출부로 안 받아줬다. 그래서 ‘프레임 영화제작소’라는 영화집단에서 단편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1992년 독일문화원과 당시 영화진흥공사가 열었던 실험영화 워크숍에 참여하게 됐다. 독일에서 온 교수가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에게 실험영화 실습을 시켰는데, 그때 <경의선>에 나온 백종학과 조민호 감독, 박찬욱 감독의 동생 박찬경을 만났다. 그때 내가 연출을 해서 단편을 하나 만들었는데, 독일 교수가 그것을 좋게 봤던 모양이다. 결국 독일 유학을 하게 된 것도 독문과를 나와서가 아니라 그 교수 덕분이었다. 그가 있던 베를린예술대학에서 강의를 들었고, 베를린자유대학에도 입학 허가를 받은 상황이었는데, 수업을 듣기보다는 도서관 다니고,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제에 다니면서 보냈다. 당시 영화 월간지 <로드쇼> 독일 통신원이었는데, 영화제 등에서 세계적인 감독과 배우들을 가까이서 보니까 막연하게 ‘나도 저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했다. (웃음)
-한국에는 언제 돌아왔나. =1995년 5월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박헌수 감독님의 <진짜 사나이>에서 조감독을 했다. 사실 이 영화를 굉장히 오래 찍어 그 사이에 연출부가 다 도망가서 결국 내가 조감독이 됐다. (웃음) 그 영화를 끝내고 조감독을 더 하려고 했지만 두 작품 연속으로 엎어지면서 자연스레 장편을 준비하게 됐다. 첫 장편으로 준비하던 게 <연>이라는 작품이다.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가 10년 동안 나누는 사랑 이야기인데, 애초에는 2002년 월드컵에 맞추자는 생각을 했지만, 여러 영화사를 옮겨 다니다 결국에는 잘 안 됐다. 그러던 찰나에 <역전의 명수>를 하게 됐다.
-영화를 만들 때도 다른 영화사에서 <역전의 명수>라는 제목을 쓴다고 해서 충돌이 있었는데. =다시 꺼내기 싫은 이야기다.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사실 나는 그 제목이 정말 중요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못하겠다. 그 이야기를 하면 내가 울게 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단지 제목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개봉 뒤에는 <씨네21> 남동철 편집장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해주지 않아 아쉽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뭘 모르고 철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영화는 대중적이고 쉬워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 안에 내 나름의 의미를 집어넣었는데 너무 쉽게들 폄하하는 게 있었다. 하여간 심적 충격이 컸고, 이겨내기 힘들어서 그때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난 주말에는 하프마라톤까지 뛸 수 있게 됐다. 혼자 달리면서 생각도 많이 하니까 좋은 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역전의 명수>와 <경의선>은 아주 다른 영화처럼 보인다.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난 이야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역전의 명수> 이후 이야기, 서사에 관한 책도 열심히 봤다. <경의선>에서는 그런 성과가 나타난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역전의 명수>를 상업영화라고 대충 만든 것은 아니다. 그 안에도 분명 내 진의가 담겨 있었다.
-다음 영화는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나. =아까 말했던 <연>이란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연말쯤에나 들어가려는데 각색본이 잘 안 나오고 있다. <첨밀밀>과 비슷한 느낌의 영화일 것 같다.
-박곡지 기사와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나. =<진짜 사나이> 조감독 시절 처음 만났다. 우리 영화의 편집기사는 박순덕 기사님이었는데, 박곡지 기사가 명절을 맞아 과일상자를 들고 스승을 찾아왔다. 박곡지가 여자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 나는 편집실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박곡지 기사가 짐을 좀 실어달라고 하더라. 그렇게 함께 돌아다녔고, 나중에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됐다. 그리고 박순덕 기사님 조수들과 박곡지 기사 조수들이 우리를 맺어주려고 했던 것 같다. (웃음) 그렇게 만나다가 마음이 가까워진 것 같다. 하여간 내게 정말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이고, 영화동지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