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가 신탁을 받아들이는 장면. 황홀경은 대기를 액체로 바꾸어놓고, 신체는 중력을 잃은 대신 부력을 받아 해파리처럼 허공에서 흐느적거린다. 옛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의 무녀들은 대지의 벌어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가스를 맡으며 환각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화산 지형에서 새어나오는 가스 중에서 환각성분을 함유한 것은 없단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무녀들이 무슨 방법으로 환각에 빠져들었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숭고는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위(僞) 롱기누스의 <숭고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모든 개인이 근원적 하나로 돌아가는 황홀함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리스 정신의 비합리주의적 특성을 강조했던 니체 역시 예술이 가진 도취와 황홀의 힘에 대해 말한다. 디지털 기술은 고대 그리스를 복원하면서 도취와 황홀의 신 디오니소스를 함께 부활시켰다. 영화 <300>에서 이미지가 발휘하는 도취의 힘은 관객을 모종의 황홀경에 빠뜨린다. 환각에 빠진 것은 무녀만이 아니다.
“현존재는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미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니체의 이 유미주의는 디지털 시대에 대중의 일상이 되고 있다. <300>은 시각적 과잉(visual excess)을 통해 너무나 단순해서 무식하기까지 한 플롯의 빈곤함을 잊게 하고, 나아가 그 바탕에 깔린 미국 우익 백인의 징그러운 남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마저 덮어두게 만든다. 이미지는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도취시킬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그래서 정신은 황홀하다.
문자에서 그림으로
20세기에 언어학적 전회(liguistic turn)가 있었다면, 21세기는 도상학적 전회(iconic turn)를 맞고 있다. 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리와 그림만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300>이 가진 ‘서사의 빈곤’은 어쩌면 비난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차피 시각적 측면과 서사적 측면은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성과 조형성을 어설프게 배합하려다가는 자칫 둘 다 산만해질 수 있다. 이 갈림길에서 <300>은 서사의 복잡성을 포기하고 시각적 과잉으로 치닫기로 작정한 듯하다.
‘대사의 빈곤’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원래 스파르타인들은 말이 많지 않았다. 영어에 ‘laconic’이라는 말이 있다. 짧게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어법을 의미한다.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스파르타에 전령을 보내어 최후통첩을 했다. “만약에(if) 내가 너희들을 정복한다면, 너희들의 도시는 불타고, 너희들의 여인은 과부가 될 것이다.” 이 협박에 스파르타인들은 시큰둥하게 딱 한 단어로 대꾸했다. “만약에(if).” 이런 사람들에게 아테네인들의 섬세한 수사학을 기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영화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만화는 아무래도 소설과 달리 플롯의 전개가 단순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복잡한 서사를 그대로 만화로 재현하려 한다면, 웬만한 분량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이다. 때문에 만화는 서사에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만 취하되, 그로 인한 결손을 이미지로 보충한다. 따라서 <300>에 서사나 대사가 부족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300>의 의도는 어차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이미지 시연에 있으니까. 만화의 영화화야말로 CG 이미지의 매체적 성격에 가장 적합한 게 아닐까?
복제에서 생성으로
19세기까지의 주요한 이미지는 회화나 그래픽처럼 손으로 직접 그리는 ‘원작 이미지’였다. 20세기의 이미지는 장치로 찍은 그림, 즉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복제 이미지’였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것은 ‘생성 이미지’. 여기서 앞의 두 이미지는 하나가 된다. 원작 이미지는 없는 것도 그릴 수 있으나 묘사의 생생함이 떨어진다. 복제 이미지는 사실성은 뛰어나나 피사체를 요구한다. 그런데 생성 이미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진적 사실성을 가지고 생생하게 나타난다.
‘컴퓨터그래픽’이란 결국 만화와 사진의 결합이다. 만화는 맥루언식으로 표현하면 정세도(해상도)가 떨어지는 전형적인 ‘쿨 미디어’다. 하지만 그래픽이 컴퓨터를 만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컴퓨터는 그래픽을 뜨겁게 달군다. 디지털 기술은 그래픽의 환상적 이미지에 사진보다 더 실감나는 고해상의 하이퍼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이때 환상은 관객의 눈앞에 사실보다 더 실감나는 현실로 나타난다. 환상이 고해상의 실재가 되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겪는 새로운 이미지 체험이다.
영화를 환상의 매체로 사용하는 경향은 아날로그 시절에도 존재했다. “지금까지 예술의 영역으로 상승하는 데에 방해가 된 것은 외부세계를 무미건조하게 그대로 복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영화의 참다운 의미와 가능성은 자연스러운 수단과 탁월한 설득력을 가지고 동화적인 것, 기적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그 특유한 능력에 있다.” 프란츠 베르펠의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대한 발터 베냐민의 반응. 그는 이런 경향이 한마디로 “반동적”이라고 잘라 말한다.
만화에서 신화로
베냐민은 판타지가 영화의 매체적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메라 매체의 본질은 현실을 냉정하게 해부하여 그것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렌즈는 육안으로 미처 볼 수 없었던 피사체의 진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진과 영화는 어디까지나 ‘복제 이미지’. 복제의 임무는 원본을 증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미지는 더이상 복제가 아니라 생성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생성 이미지는 그 성격상 판타지에 가깝다. 그래서 베냐민의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썰렁하게 들린다.
하지만 베냐민의 우려를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로 흘려버려도 될까? 예를 들어 만화는 해상도가 낮아 실재로 착각하지 않는다. 사진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만화는 허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픽이 컴퓨터를 만나 CG가 될 때, 사정은 달라진다. 이제 환상은 실재와 똑같은 생생함을 가지고 나타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로써 만화는 졸지에 신화가 된다. 만화와 신화는 다르다. 만화는 그저 허구이나, 신화는 사실과 허구의 범벅이다. 그것은 허구이면서 사실로 기능하는 ‘이야기’다.
적군의 화살이 햇빛을 가린다고 하자 스파르타인들은 태연히 말한다. “땡볕 아래 싸우지 않아서 좋군.” 그리스인들은 활을 사용하는 것을 비겁하게 여겼다. 페르시아군이 미디어 군대라면, 스파르타군은 육체를 무기로 삼는 원시적 군대다. 온몸을 훌떡 벗고 다니는 것도 썩 문명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페르시아가 문서통치로 거대한 제국을 운영할 때, 그리스는 구술문화에 머무르며 목소리 들리는 범위 내의 폴리스로 운영됐다. 서구인들이 자랑하는 ‘민주주의’도 실은 이 ‘동네 리그’의 후진성의 소산이다. <300>의 영상은 문명과 원시를 뒤집어놓는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대중은 황홀하다
오늘날 무구한 눈으로 실사와 그래픽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에 관객은 더이상 고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생성 이미지 시대의 대중의 의식. 복제는 원본(史實)과 부합할 의무를 갖고 있으나, 피사체 없는 생성은 애초에 일치해야 할 원본이 없다. 중요한 것은 현란한 디지털 영상의 미적 효과다. “현존재는 오직 미적 효과로서만 정당화된다.” 이 유미주의적 시대에 텍스트로 쓰는 ‘역사’는 이미지로 그리는 ‘신화’로 대체된다. 대중은 황홀하다.
추기: 여기에는 어떤 불편함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나치는 역사를 신화로 대체했다. 거기에 그들은 영화와 사진의 아날로그 영상을 동원했다. 베냐민이 영화를 판타지의 도구로 삼는 것을 경계한 것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얼마 전 고구려 드라마를 보고 감동먹은 이들이 ‘삼족오소년소녀대’를 조직했는데, 그 스카우트의 복장과 상징이 공교롭게도 히틀러유겐트의 것을 빼닮았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일의 디지털 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