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학고재 펴냄
<남한산성>은 3년 만에 만나는 김훈의 장편소설이다. 김훈은 병자호란를 버티어 치욕으로 목숨을 부지한 조선의 어느 겨울을 남한산성에서 살핀다. 이 책의 ‘일러두기’는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고 미리 못박고 시작한다.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전장의 복판에서 살고 싸우고 고뇌했던 이순신의 시점에서 기술했던 <칼의 노래>와 달리, <남한산성>은 겨울바람처럼 매서운 눈으로 남한산성에 모여드는 자들을 살펴 글로 옮긴다. 채 2개월을 넘기지 않은 병자호란의 고요한 전장, 말(言)이 들끓는 성 안과 말(馬)이 먼지를 일으키는 성 밖의 모습은 역사책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서늘한 생생함을 떠올리게 한다.
인조는 강화로 발걸음하다 남한산성에 기거하기 시작한다. 정묘호란으로부터 10년이 막 되는 때다. 초반에 나오는 “부딪혀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외줄기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 길들이 모두 뒤섞이면서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은 얼어붙은 전장에 치욕의 봄이 오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항쟁을 주장하는 김상헌과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말은 각기 높으나 성 안에서 들끓을 뿐이고, 성 안의 군사들은 칸의 문서가 왔다는 말에 오히려 위로받는다. 성 안의 임금은 성 밖의 칸과 칸의 군사들을 두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올리며 춤을 추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출성해 칸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를 행한다.
역사를 정확히 재생하는,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는 <남한산성>과 거리가 멀다. 간결해 보이는 문장을 채우는 단어들은 무겁고, 임금의 말을 늘어뜨리는 말줄임표에 채 담지 못한 한숨이 깊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말로 높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데 <칼의 노래> 때보다 적극적이다. 책 안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봄을 맞는 대장장이 서날쇠나 극천(極賤)했던 출생에도 청의 역관 노릇을 하는 정명수의 삶이 이름 높은 사람들보다 더 깊게 다가온다. “이 세상의 바탕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이성이 아니라 악과 폭력이어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약육강식의 문제로 나타난다. 거기에 승복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에 말려들거나 때로 저항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 삶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김훈의 말은, <남한산성>과 오늘날의 세상 독법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