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즈>의 일본인 역할 맡은 한국인, 제임스 기선 리를 둘러싼 공방
<히어로즈> 캐치온 매주 월·화 오전 10시 캐치온 플러스매주 월·화 오후 10시10분
이제 미국 드라마(미드) 열풍과 관련해 ‘미국 드라마계에서 한국계 배우들 맹활약’ 운운하면서 <로스트>에서의 비중있는 역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김윤진을 언급하는 것은 아주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배틀스타 갈락티카>에서 인간의 아이를 낳고 인간을 돕는 사일런(일종의 로봇)을 연기하고 있는 그레이스 박에 대해 자세히 언급해야 그나마 식상한 느낌이 덜 들 정도다. 미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만큼 미드에서 활약 중인 한국인 배우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 중이고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방영을 시작하며 화제가 되고 있는 미드 <히어로즈>(HEROES)에도 한국계 배우가 한명 출연 중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TV판 <엑스맨>’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국내에는 그 배우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오히려 그가 한국계 배우라는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지 않다. 그 비운(?)의 주인공은 바로 일본인 초능력자 히로(마시 오카)의 단짝 친구 안도 마사하시 역으로 등장해 코믹하면서도 시니컬한 역을 선보이고 있는 제임스 기선 리다.
10살 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긴 했지만, 제임스 기선 리는 1975년 한국에서 태어난 순수토종 한국인이다. 뉴욕에서 살다가 보스턴대학에서 공부하며 연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그는, 2001년 LA로 이주해 본격적인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웨스트 윙> <라스베거스>(<CSI: 라스베가스>인지 <라스베가스>인지 확인?) 등의 미드에 단역으로 얼굴을 내밀거나 목소리 출연한 것이 경력의 전부인 그저그런 스타워너비 중 한명이었다. 그런 일천한 경력의 그가 <히어로즈>에 주연급 조연으로 캐스팅된 것은 그야말로 일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에게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 스토리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방영 초기부터 그를 둘러싸고 거세게 불어닥쳤던 논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논란이란 대학에서 일본어를 한 학기 공부한 것이 전부인 한국계 미국인이 주요 대사를 일본어로 처리해야 하는 일본인을 연기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방영 초기부터 그가 내뱉는 일본어 발음에 대해 일본에 사는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계 미국인들까지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 그 결과 각종 <히어로즈> 관련 사이트에는 제임스 기선 리의 일본어 발음을 질타하는 항의성 게시물들이 계속 올라왔고, 그가 인터뷰를 할 때면 일본어 실력에 대한 질문들이 끊이지 않았다.
짐작건대 <로스트>에서 영어를 전혀 못하는 한국인 진권으로 출연 중인 대니얼 대 김의 한국어만큼이나 그의 일본어가 거슬리는데, 거기에 그가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져 일본인과 일본계 미국인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마냥 ‘속 좁은 일본인’들이라고 나무랄 수만 없는 것이 사실이다. 대충 얼굴만 아시아인이면 극중 사용하는 언어의 구사능력과 상관없이 출연시키는 미국식 캐스팅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니얼 대 김도 시즌3 종반에 이른 지금은 어느 정도 들어줄 만하지만, 시즌1에서는 거의 외계어 수준이어서 짜증을 자아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튼 다행인 것은 그런 논란에도 그의 매우 독특한 연기에 매료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군으로 등장해 그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일본어 연기는 어색할지 모르지만, 전체 드라마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고 또 주요 인물 중 초능력이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 향후 숨은 초능력을 보유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비록 원하지 않았던 논란의 대상이 됐지만 자신을 지원하는 팬들의 성원에 기대어 이번 논란을 잘 마무리한 뒤, 그가 제대로 된 한국어나 영어를 구사하는 역할로 팬들과 또 다른 성공적 만남을 만들어낼지 지켜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