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뽑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햇살 가득한 창가에 놓인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최신 노트북을 가볍게 두드리고, 가끔 유명배우·감독과 전화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풍경을 기대한다면 차라리 영화나 보시길. 영화의 이야기들을 담아낸 지 12년이 된 <씨네21>이지만 그들의 제작 현장은 영화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원두커피 대신 여러 번 우려낸 녹차와, 마호가니는 고사하고 자료들이 가득 쌓여 있는 책상 앞에서, 영화와 현실이 맞닿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기 위한 고민을 이어나가는 <씨네21>의 사람들. <씨네21> 한권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과정들을 거치는지, 600호의 제작현장을 통해 알아본다.
사전작업_회의, 회의, 회의
그 일정은 월요일 오전 분단(취재기자들이 앉은 줄에 따라 3개의 분단이 있다. 취재1팀, 취재2팀 같은 말 대신 분단이라고 표현하는 건 학생 때의 추억 때문일까)별 기획 회의부터 시작된다. “일단 써놓고 봤어요” 라고 말하는 김도훈 기자의 발제로 시작한 1분단의 회의. “약간 면피성이긴 한데…”라며 자신의 기획안을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최하나 기자. 기획안을 발표하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이 과정을 통해 다듬어진 이야기들은 분단장들과 편집장이 참석하는 수요일 팀장회의에서 다시 논의되며, 다음호의 기획안을 비롯해 한달 분량 씨네21의 윤곽으로 탄생한다. 이어지는 취재팀의 기획 회의에서는 어떤 기사를 누가 맡을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며 기획안을 확정해가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심각한 고민과 격렬한 토론이 이어지는 회의를 상상하지 말라. 좋아하는 배우의 이름이 나오자 한숨이 새어나오는 오정연 기자와 계속해서 손톱을 물어뜯는 김도훈 기자. 이영진 기자는 혼잣말을 하다가 손톱을 깎기까지 한다. 그렇게 딴짓을 하며 웃고 떠들다가도, 의견 제시할 때만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하니, 거 참, 신기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한 주 마감이 끝나고 진행되는 금요일 전체 주간 회의에서는 <씨네21>의 모든 팀이 참석해 다음주에 만들 <씨네21>의 페이지 수, 마감일자 등을 정하고 진행상황 보고를 하며 더 좋은 의견이 없는지 끊임없이 생각들을 주고받는다.
현장체험_취재와 촬영
그렇게 회의에서 확정된 사항들로 취재가 시작된다. 지난 4월14일 광화문에서는 정윤철 감독과 김영진 평론가의 대담이 이루어졌다. “아, 멋집니다. 좋-습니다. 으핫핫핫.” 손홍주 사진팀장은 큰 웃음 소리로 상대방의 긴장감을 풀어주며 촬영을 진행한다. “독자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는 그의 말처럼, 구석구석 소소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고 찍는다. 촬영 후 시작된 김영진 평론가와 정윤철 감독의 대담은 긴 시간동안 이어졌고, 인간 타자기로 변신이라도 한듯 정재혁 기자는 그 이야기들을 빠른 속도로 받아쓴다.
16일 오후 2시, LG 아트 센터에서 있었던 연극 <필로우맨>의 연습 현장. 배우들과의 인터뷰 이후 이어진 연출자 박근형 씨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돌발 상황이 일어난다. 장미 기자의 녹음기 안에 건전지가 없었던 것. 이런 황당, 아니 당황스런 시츄에이션에도 흔들림없이 입으로는 묻고 귀로는 들으면서 손으로는 내용을 적어내려가는걸 보니 그는 분명 좌뇌와 우뇌가 모두 발달한 사람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한다.
다음날 한겨레신문사 8층의 스튜디오에서는 배우 강인형의 스포트라이트 촬영이 진행되었다. 서지형 기자는 소품을 바꾸기도 하고, 조명의 위치를 옮기며, 다양한 구도와 모습을 담기 위해 엎드리기도 하고, 사다리 위에도 올라가며 오랜 시간동안 촬영을 한다. “조명 세팅부터 스타일링까지 어시스턴트 없이 하는 모두 혼자 소화하는 작업은 꽤 힘들어요. 그래서 <씨네21>의 촬영은 전투적이죠.”
마의 클라이막스_마감
취재를 마친 취재 기자들은 기사 작성을, 사진 기자들은 수 백장의 사진 중 베스트 컷을 골라내는 작업을 시작하며 마의 마감지대로 돌입한다.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마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무실을 채우는 것은 컴퓨터 자판을 격렬하게 두드리는 소리들뿐. 노트북 앞에 앉아 철야를 밥먹듯 하는 취재기자가 안쓰러워도 무릇 잡지란, 당장 세상이 망해도 제날짜에 맞춰 나와야하는 것. “혜명, 다 됐어?” “아, 거의 다 썼는데요, 문제가 잠시 생겨서….”“그래, 그래, 문제가 안 생기면 마감이 아니지.”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이들은 남동철 편집장과 박혜명 기자 뿐만이 아니다. 인쇄 일정을 생각하니 마감때가 되면 편집장과 함께 편집팀은 며느리 구박하는 시어머니가 될 수밖에. 문석 팀장은 기사 작성을 “자뻑과 절망의 무한반복”이라고 표현한다. 기사마감 시간에 쫓겨 최고의 기사를 쓰겠다는 처음 다짐과는 다른 기사에 좌절하고, 때론 생각보다 잘 쓰여진 기사에 흐뭇해하다가 시간이 지나 다시 좌절하는 싸이클의 반복이라고.
결국 목요일 오후까지 늘어져버린 기사마감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분주해진 이들은 편집팀과 디자인팀이다. 일단 넘어온 기사를 주무르고 매만져서 책 꼴로 만드는 작업은 교열·편집팀과 디자인팀의 몫이기 때문. 심은하 편집팀장이 파티션 너머로 조용히 말한다. “영진, 이거 좀 잘라야겠는데.” 편집팀은 기사의 양을 조정하고, 교정ㆍ교열 작업을 마친 후, 기사마다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을 달아준다. 그렇게 기사는 디자인 파트로 넘어간다. “어려운 기사도 어렵지 않게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권정임 팀장의 말을 증명하듯 길고 긴 창간특집기사도 유머러스한 일러스트의 날개를 달고 종이 위에 날아가 앉는다. 디자이너와 편집·교열기자, 취재기자의 3인4각 릴레이 끝에 모든 작업이 마무리되면 최종적으로 편집장의 OK를 받는다. 편집장은 처음 편집방향과 잘 맞는지, 미쳐 발견 못한 실수는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박해미만큼은 아니지만 시원스런 ‘OK’ 두 글자로 작업을 끝낸다. 컬러 인화지로 다시 한번 확인작업을 끝낸 페이지들은 화상제작팀으로 보내져 필름으로 출력되고, 제작팀 여인석씨의 확인을 거쳐 인쇄소로 보내진다. 목요일 밤 11시경부터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인쇄 작업이 끝나는 금요일 오전, 제본작업의 완료와 함께 배송이 시작되고, <씨네21>은 독자들을 만날 준비를 마친다.
에필로그_날아라 씨네리, 날개가 없어도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 클라크 켄트는 슈퍼맨이지만, <씨네21>을 완성하는 이들은 그저 사람일 뿐이다. 세상을 구할 수도, 날아다닐 수도, 모든 독자와 영화인들을 만족시킬 수도 없지만, 오늘도 그들은 어깨에 빨간 망토 대신 오십견을 매고 달린다. 영화에 대한 무한애정 하나만으로, 매주매주 즐거운 <씨네21>을 만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