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톳빛 모래와 작열하는 태양으로 달궈진 사막에서 귀향을 꿈꾸며 끝없는 싸움을 치러야했던 고려의 무사들. 이들의 거칠고 고단한 숨결을 담은 <무사> 뒤에는, 이들 못지않게 힘겨운 강행군을 견뎌야했던 또다른 ‘무사’들이 있었다. 바로 김성수 감독의 지휘 아래 뜨거운 사막과 혹한의 바닷가를 누빈 한·중 양국의 스탭들이다. 지난 9월 한국을 찾았던 장샤와 리밍산, 황바우롱은 <무사>의 대장정에 의기투합했던 중국 스탭 3인방. 언어가 통하지 않는 현장에서 수개월간 <무사>와 동고동락하며, 600여년 전 고려 무사들의 여정을 실감나는 그림으로 직조해낸 사람들이다. 새삼 <무사>의 작업을 돌이켜보는 인터뷰에서 “정말 강행군”이었다고 입을 모았지만, 영화를 몇번이나 봤냐며, 여러 번 봐야 되는 영화라고 강조하던 이들은, 고달팠던 기억보단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무사>의 경험담을 풀어놨다.
우선 중국쪽 프로듀서를 맡은 장샤는 중국전영집단(전 베이징제편창) 소속의 여성 프로듀서. 세월이 곱게 앉아 소녀 같은 분위기와 자그마한 체구만 보면 어디서 거친 현장을 다독이며 이끌 힘이 나올까 싶지만, 리밍산과 의상의 황바우롱 등 현지의 유능한 스탭들을 꾸려낸 공로자다. 현재 3개 제작부로 나뉘어져 있는 중국전영집단에서 제1제작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주로 합작영화를 담당한다고. 어려서부터 영화에 관심을 갖고 프로듀서가 된 데는 영화적인 환경을 갖춘 집안의 영향이 컸다. 베이징제편창 시절 소장의 비서였던 아버지가 합작영화 담당을 거쳐 베이징아동영화제작소 부소장을 지내며 영화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87년부터 영화일에 뛰어든 장샤의 손을 거쳐간 작품은 <현 위의 인생> <패왕별희> <시황제 암살자> 등 첸카이거의 영화를 비롯해 20여편에 이른다. 90년대 중반 홍콩, 대만과의 합작은 많았지만 <무사>는 한국과의 첫 합작 경험. “가장 힘들었던 때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였다.서로 접근하고 이해하는 과정이고, 처음 같이 해보니까 작업방식도 달랐다.” 초기에는 언어 소통의 문제도 컸지만 일정한 적응기가 지난 뒤에는 자연스레 이해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프로듀서가 창작쪽은 거의 관여하지 않는” 중국과 달리, “시나리오를 들고 여기저기 의견을 물어보는”가 하면 서로 토론을 아끼지 않는 조민환 프로듀서와 김 감독의 풍경이 인상 깊었다고. “본능적이고 사실적인 액션을 보여주는” <무사>의 작업은 물론 힘든 만큼 재미있었지만, 원래 액션과는 아니다. “문예영화라고 할까? 인간미가 흐르는 영화, 같은 잔잔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그는, 이미 <요원한 뽈, 초원>이란 차기작을 진행중이다.
장샤를 통해 <무사>에 합류한 도구와 소품의 리밍산, 의상의 황바우롱은 이미 여러 작품에서 손발을 맞춰온 콤비. 각각 80년과 84년에 베이징제편창에서 영화를 시작한 이들은 서극의 <촉산> <패왕별희>와 <시황제 암살자>, 가장 최근의 <와호장룡>과 <무사> 등 줄잡아 7편 정도를 함께해왔다. “<무사> 덕분에 처음 한국에도 와 보게 됐다”며 사람좋은 웃음을 웃는 두 사람은, 인터뷰가 못내 쑥스럽다고 서로에게 답을 넘기곤 했다. 처음에야 말도 안 통하고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눈빛만 봐도 알아서 중국 사람은 중국말 하고, 한국 사람은 한국말로” 얘기하며 지냈다는 <무사>는, “인정이 너무 깊어서 다른 영화랑 달랐다”며 말문을 열었다.
바람을 가르는 여솔의 창과 위력적인 가남의 도 등 <무사>의 병장기를 제공한 리밍산은 3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도구 및 소품을 담당해온 베테랑. <와호장룡>의 날렵한 청명검을 세공해낸 솜씨로, <무사>에서 대형 병장기 40여종과 단검 20여종을 포함해 수백개의 무기를 생산해냈다.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한국의 영화인들과 하는 거라 일단 시나리오를 숙독하고 감독과 얘기하면서 소품의 톤을 정했다.” 9명 무사의 병기들이, 인물의 성격을 잘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감독의 주문대로, 그의 무기들은 각 인물들에 잘 어울려 있다. 색목인에게서 구한 만큼, “서구적인 스타일과 인도, 중국 스타일을 결합”한 창은 여솔에게 맞도록 날렵하고, 진립의 활 역시 그의 몸놀림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병장기마다 클로즈업을 위한 진짜와 싸움에 쓰일 가짜를 꼼꼼히 만든 것도 수시로 칼이 부딪치는 <무사>의 액션에 생동감을 더했다. 수천개의 무기가 필요한 <시황제 암살자> 같은 영화에 비하면 작업량은 중간급이었지만, “동작이 파워풀해서 두세 테이크 찍으면 쉽게 무기가 부서지는” 터라 수리할 일이 많아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고.
리밍산의 도구와 함께 영화와 시대의 분위기를 톡톡히 살려낸 의상의 황바우롱 역시, 30편가량의 영화에 옷을 입혀왔다. 도구 이상으로 인물의 성격을 고려한 <무사>의 의상은, 시나리오를 읽고 전체적인 이미지 샘플을 만들어가며 수정을 거친 결과. “처음에는 언어소통문제도 있고, 감독이 어떤 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이해한 대로 만들어가면 이게 아니다, 그러면 다시 얘기하고, 연구하고.” 전체적인 이미지는 “소박하면서도 가벼운 듯, 바람에 날리는 듯한 느낌”으로 잡되, 최정과 가남에게는 위풍을 드러내는 갑옷을, 여솔에게는 자유로움이 느껴지록 심플하면서도 옷자락이 펄럭이는 의상을, 부용공주에게는 황실의 색상인 황색 의상을 입혔다.
활동적이면서도 정신적 지주로서의 위엄을 담아야 하는 진립의 의상이 가장 까다로웠다고. 현대의 옷감만으로는 풍부한 질감을 낼 수 없어 다양한 재료를 구하고, 제 색을 찾기 위한 작업에 연출부고 제작부고 매달려 “거의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인물마다 새 것, 약간 낡은 것, 완전히 낡은 것 등 3종씩을 준비하면서 새로 지어낸 옷만 180여벌. 대여한 것까지 합치면 모두 400여벌에 이른다.“내가 만든 의상을 입은 배우가 리밍산이 만든 소품을 들고 있으면 잘 어울린다”는 황바우롱의 은근한 자랑은, <무사>에서도 유효하다. “소품실에 가면 의상 담당 아저씨가 앉아 있고, 의상실 가면 소품 담당 아저씨가 앉아 있고. 그래서 늘 노는 것 같지만 서로 보면서 참고를 많이 한다”고들 말할 만큼 호흡이 잘 맞는 동료들이니까. 비단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이들의 행로는 꽤 비슷하다. 고교를 졸업한 뒤 농촌이나 오지에서 노동 현장을 경험하는 하방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에서 일하다가, 당 기관의 배치에 따라 베이징제편창에 들어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체제가 다르다”는 리밍산의 설명에 따르면,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베이징제편창에 배치될 때부터 소품부여서” 소품 담당이 됐다고. 의상부에 배치된 황바우롱도 마찬가지. 둘 다 “특별히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라지만, 하면 할수록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이 작품에 적합한 게 뭘까 고민하다 보니 항상 배우는 과정”인 것도, “내가 만든 게 스크린에 나왔을 때, 그 효과가 바라던 느낌으로 나오는” 재미도, 영화라는 소우주의 창조를 그만둘 수 없게 했다. 두 계절을 꼬박 상납한 <무사>를 뒤로 하고, 지금은 장이모의 신작 <영웅문>을 함께 준비 중이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 임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