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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정치적 괴멸!

웃음만 있고 감동은 없는 장규성 감독의 <이장과 군수>

<씨네21> 제597호에서 변성찬은 <이장과 군수>를 장규성 영화들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면서, ‘현실’에서 출발한 ‘착한 영화’이자, ‘웃음에서 감동으로의 전환이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실패와 과도한 복종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정치적 저항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나는 이에 반대한다. <이장과 군수>가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와 마찬가지로 농촌과 학교라는 아이콘을 통한 노스탤지어에 기대고 있으며, 주연배우를 통해 상당한 웃음을 뽑아내는 코미디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전작들과는 달리 웃음은 감동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이장과 군수>는 ‘착한 영화’도 아니거니와 ‘정치적 저항을 보여주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전작들에는 없는 억지스런 선악구도를 통해 ‘현실정치’를 왜곡하고, 그 결과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괴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장과 군수>는 과연 ‘현실’에서 출발한 영화가 맞다. 그렇다보니 ‘현실 정치’의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이 오버랩되는 정치코미디가 되어버렸다. 이 글에선 <이장과 군수>의 ‘동창생-코미디’로서의 성취나 허점은 논외로 하고, ‘정치-코미디’로서의 난맥상을 짚고자 한다.

1. 강덕군=부안군?

신임군수는 강덕군이 재정이 부실한 지자체이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폐장 유치사업만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며 유치의사를 밝힌다. 그 결정에 지역주민이나 지방의회나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과정은 없다. 군수는 이를 언론에 터뜨리고, 주민들을 설득해야 한다며 이장들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방사능 폐기물이 유해하지 않다는 설명을 해댄다. 이때 반대자가 나선다. 그는 ‘생태마을’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었던 사람이지만, 그가 반대를 하는 이유는 개인적 감정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가구당 보상금은 얼마인지 똑똑히 말해야지.” 이장들 끄덕끄덕. 본격적인 반대운동에 나선 그의 뒤에 지역유지(자본가)와 낙선자(구정치인)와 부군수(관료)가 있다. 그들이 왜 방폐장 유치를 반대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대쪽 같은” 신임군수에 반대하며, 그를 음해하려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가 바라보는 방폐장 사태란 이런 것이다. 군수가 지역발전을 위해 소신을 가지고 추진한 사업이지만, 군수를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개인적인 감정(열등감)이 있는 자를 내세워 주민들을 선동하였는데, 주민들이 동조한 이유는 보상금에 대한 협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다가 ‘학교’운동장에서 ‘군수를 폭행’하는 사태에 이르고, 결국 ‘주민투표’로 방폐장 유치사업은 무효화되는데, 이러한 구체적인 사건들이 2003년 부안군 사태와 닮아 있다(그러나 가치판단은 심하게 왜곡돼 있다). 부안군 사태는 인권위가 행복추구권에 대한 침해라고 결정하였듯, 어느 정도 평가가 마무리된 사건이다. 군수가 지방의회와 주민의 뜻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추진하면서 향응과 편파적인 선전을 일삼았고, 특히 직접보상의 가능성을 언급했다가 부인함으로써 지역주민들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하는 시민단체나 핵시설 자체를 반대하며 ‘생태마을’을 조성해야 한다는 환경론자들에 대해선 중앙정부와 언론이 ‘님비현상’이니 ‘반대를 위한 반대’ 등으로 매도하면서 연일 계속되는 반대시위와 등교거부, 심지어 군수폭행사건 등이 벌어졌다. 이때 주민과 경찰의 충돌로 500여명이 부상당했고, 320여명의 주민이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92%의 주민이 반대표를 던진 주민투표의 결과가 어렵게 인정되어 사태는 종결됐지만, 부안은 아직도 후유증을 앓는 중이다. <이장과 군수>는 이 과정을 재편집하면서, 군수의 유치의지는 지역발전이라는 명분하에 정당하고, 주민의 의견수렴 과정을 생략한 절차상의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그린다. 반면 반대파의 의지는 사악하거나 한심하거나 불분명하게 그리면서, 환경론자들의 선명한 반대논리마저도 기득권자들의 모호한 반대논리와 구분하지 않고 뒤섞는다. 어쩌다 이런 왜곡이 빚어진 것일까?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투사된 군수를 중심에 두고, 반대자들을 한 덩어리로 인식함으로써 빚어진 현실 정치적 코미디이다.

2. 노대규=노무현?

노대규 군수는 젊은 정치 신인으로, 1표 차이로 ‘기호 2번’의 구군수을 누르고 당선된다. 노대규는 인맥도 경륜도 없이 오로지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하려는 진정성만으로 선거판에 뛰어들어 장터를 누비며 유세한 결과, 참신한 인물을 바라는 주민들의 지지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돈으로 매수하려는 지역유지와 노회한 부군수와 그들과 은밀하게 내통하며 다시 군수자리를 노리는 구군수다. 이들은 애초에 노대규를 군수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며, 그의 소탈한 스타일과 개혁 정책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봐 그의 정책을 반대한다. 나아가 군수를 모함하는데, 여기에 지역신문까지 합세하여 흠집내기에 나선다. 그들은 주민들을 선동하여 마침내 주민투표를 통해 군수를 쫓아낸다. 대통령이 꿈이었다는 노대규는 옛 친구에게 말한다. “내 그 판이 더러운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이 구도는 노사모 혹은 친노진영의 정치인들이 인식하는 현실 정치의 판본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니까 한나라당을 비롯한 구정치권과 자본가와 관료와 언론 등이 똘똘 뭉쳐 소탈하고 개혁적인 노무현 대통령을 매사에 무시하고 반대하며, 언론을 통한 진의왜곡을 일삼고,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온갖 공작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대선에서 패배하여 ‘우리의 대통령’은 초야로 사라지며, 저런 멘트를 날리실 것 같다는 것이다(이를 변성찬은 ‘현실적 실패를 드러내는 저항정신’으로 보았다). 그런데 노대규가 실패한 것이 과연 기득권 세력들의 공작 탓이라 보는 것이 온당한가? 그는 지역주민의 지지로 선출된 민선군수면서, 주민의 동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방폐장 유치 사업을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행했다. 그는 자신이 이장들을 모아놓고 설득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는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가 되었어야 했다. 그는 중앙지는 호의적인데, 지역신문은 악의적이라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중앙지와 지역신문의 관점과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식했어야 했다(중앙지는 어느 지역이든 방폐장이 유치되면 그만이니 긍정적이지만, 지역신문은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해야 하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또한 자신을 지지한 주민만큼이나 지지하지 않은 주민들도 많다는 사실과 행정경험이 없기 때문에 공무원들을 다 장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발판으로, 자신을 불신하는 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해 신중하고 영리한 접근을 폈어야 함에도 방폐장 유치라는 까다로운 사업을 성급하고 무리하게 펴나간다. 이 과정에서 정작 자신을 지지했던 주민들은 소외되고, 방폐장이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지, 과연 지역발전을 위한 유일한 선택인지, 지역발전이 환경과 맞바꿀 정도로 절대적인 당위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보상금 문제와 핵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님비주의라는 오명을 덮어쓴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사분오열되고 급기야 학교운동장에서 폭력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군수의 책임이다. 애초 정책선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추진과정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반성하지 않고, 반대자들의 논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이 “더러운 정치판” 기득권자들의 권모술수 탓이라 믿는다. 스스로 도덕과 진보와 개혁을 선취했다고 믿는 그! 영화 또한 이런 노대규의 자의식을 추인한다. 그는 선하다,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악하다, 주민들은 그의 진심을 오해하였다 등등.

3. 방폐장=FTA?

노대규는 말한다. 군을 발전시킬 유일한 정책은 방폐장 유치사업이라고. 그가 이 정책을 선택하는 데는 관료회의 한번이 전부다. 그는 옛 친구였던 자의 예상치 못한 반대에 부딪히자, 자신의 약한 입지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이 정책에 집착한다. 그가 믿는 것은 지역발전을 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주민들이 지역발전을 원하는지 환경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또 방폐장을 유치했을 때 주민들에게 돌아갈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다. 다만 지역발전이라는 막연한 장밋빛 청사진으로 주민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주민들의 현실적인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는 반대에 부딪힐수록, 자기 확신이 공고해진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단식에, 분신이 벌어지려 하지만, 그는 “저놈은 내가 잘 안다”(사실 내 친구다)라며, 다른 주민들이 왜 반대 입장에 동참하는지 헤아리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성장 동력이자, 한-미관계를 위해서라도 FTA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충분한 의견수렴 절차없이 강행되는 FTA에 반대자들이 속출해도 그는 점점 더 자기 확신의 최면을 걸며 올인했다. 심지어 반대론자들도 모두 ‘전략적인 반대를 하는 것’이요, ‘내가 설득하면 찬성으로 돌아설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현실 정치가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기득권 세력들은 FTA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는 점이고, 반대론자들은 실제로 밥을 굶고 몸에 불을 붙이며 그를 더이상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전선은 다시 명확해졌다. 노무현 대(對) 그를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노무현을 위시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 대(對) 그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영화는 설익은 코미디지만, 현실은 무르익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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