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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걸작 <천년학>

세상의 어떤 영화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스쳐지나간 그곳에 흘린 것은 없는지,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잊은 것은 없는지. 기억을 헤집으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잔상들이 쓰지 않던 감각을 일깨운다.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이런 영화의 대가들은 노스탤지어에 투항하는 법이 없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되 향수에 머물지 않고 후회와 탄식의 눈물을 자아내는 경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임권택의 <천년학>은 그런 영화다. <씨네21> 27쪽을 할애한 이번 특집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를 기념하는 의례적인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감독 임권택에 대한 예의 이전에 <천년학>이 걸작이기 때문이다.

<천년학>은 사연 많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도, 소리라는 사라진 예술에 관한 이야기로도, 인정사정 볼 것 없던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이야기로도 보인다. 어디에 방점을 찍든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은 사라진 어떤 정취에 젖게 된다. 그것은 시각적으로는 학이 날개를 펴고 물 위를 나는 듯한 선학동의 풍경이고 청각적으로는 <춘향가> <심청가> 등 더이상 불리지 않는 소리라는 예술형식이다. 그리고 인물로 보면 다름 아닌 눈먼 누이 송화다. 실패한 소리꾼 유봉에겐 자신이 못 이룬 예술가의 한을 달래줄 딸이고, 유봉 밑에서 혼자 도망친 동호에겐 평생을 따라다니는 죄의식이자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며 선학동 주막의 용택에겐 감히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신적 존재인 송화. 동호는 그녀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년가봐”라고 말하지만 날개옷이 없는 송화는 승천하지 못하고 속세에서 기구한 삶을 이어간다. 선학동의 물이 말라 땅이 되듯, 소리가 대중예술의 자리에서 밀려나듯, 송화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보이다가도 자꾸 멀어진다. 애절한 사연이 굽이굽이 이어지는데 눈물을 보이지 않는 <천년학>은 누구를 탓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들어 있는 장면들은 물러서지도 앞서 나가지도 않으면서 그 시대 그 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을 지켜본다. 무언가를 선택할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주어진 삶을 안간힘을 다해 살아갈 때 왜 저들은 저렇게 미련하고 못나게 살았나, 라고 묻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천년학>은 그렇게 시대와 운명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말하는 중이다. 동호가 송화를 위해 지은 집을 그 상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집이 완성됐을 때 정작 찾아온 것은 송화가 아니다. 동호의 바람은 다시 한번 유예된다. 송화는 그렇게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정복할 수 없는 숙명을 의인화한다. 모두가 얘기하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선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라는 송화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천년학>은 간절히 이루고 싶었으나 이룰 수 없던 어떤 꿈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번호 표지 제목에 ‘거장 임권택, 걸작 <천년학>’이라고 달면서 얼마간 망설였다. <천년학>이 걸작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지만 임권택 감독에게 거장이란 수식어는 지나치게 관습적인 것이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장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천년학>이 보여주는 지혜와 통찰력은 젊은 영화작가들이 보여주는 개성과는 다른 차원인데 그걸 압축하는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해서다. 부디 거장이라는 표현을 식상한 관용어로 받아들이지 마시길. 우리가 이 말을 원래 의미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하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천년학>이 임권택 감독을 돌아볼 기회를 마련해준 것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영화평론가 김소영·허문영·정성일, 김선두 화백, 김대승·김태용·김지운·김성수·정윤철·윤제균·이현승·민규동·봉준호·정재은 감독 등 이번 특집에 참가한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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