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 회복을 위한 길이 막혔다. 4월2일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스크린쿼터는 ‘현행유보’로 결정됐다. 이에 따라 한국 영화산업이 위기에 처하더라도 스크린쿼터를 현행 73일 이상으로 늘리지 못한다. 지난해 초 정부는 한-미 FTA 협상을 앞두고 146일이던 스크린쿼터를 73일로 줄였다. 스크린쿼터는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 마련을 위한 ‘4대 선결조건’ 중 하나로 포함됐다. 이후 정부는 “스크린쿼터 축소가 FTA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여러 번 밝혔으나, 스크린쿼터는 협상 시한을 앞두고 또다시 협상의 ‘미끼’로 사용됐다.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 등 영화계 단체들은 FTA 협상이 졸속적으로 이뤄졌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4월3일 영화인대책위는 성명을 내고 “정부는 지난 3월 초 8차 협상에서 스크린쿼터를 다시는 늘릴 수 없게 현행유보로 합의해놓고도 타결 직전까지 스크린쿼터는 빅딜카드가 아니라고 속여왔다”며 “한국영화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정부가 도대체 왜 이렇게 한국영화를 사지에 몰아넣었는지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공격했다. 그리고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등과 함께 ‘한-미 FTA 협상의 원천무효와 노무현 퇴진투쟁’을 벌일 계획이라고 영화인대책위는 밝혔다.
‘현행유보’로는 스크린쿼터 늘릴 방도 없어
스크린쿼터에 현행유보를 덧씌운 건 스크린쿼터를 무력화하는 조치를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불만도 터져나오고 있다. 이는 문화관광부가 FTA 협상 타결 직후 발표한 ‘문화분야 국내보완대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화관광부는 스크린쿼터 현행유보는 “향후 영화산업 환경변화에도 조정이 불가”함을 뜻할 뿐 아니라 “스크린쿼터 추가 축소시에 축소된 대로 구속력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연간 73일에서 40일로 줄어들면 40일이 스크린쿼터 최대치가 되는 것이고, 단 하루로 줄어들면 1일이 스크린쿼터 최대치가 된다. 스크린쿼터가 줄면 줄었지 더이상 늘릴 방도는 없다는 뜻이다.
지난해 73일 스크린쿼터 축소를 전후로 정부와 재계가 “스크린쿼터를 단 하루도 줄일 수 없느냐”며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붙인 데 대해 영화계가 “그래, 우리 밥그릇 챙기려고 거리에 나왔다”고 맞선 건 그런 이유다. 스크린쿼터 146일이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임계점’이었기 때문이다. 아이필름 오기민 대표는 “정부가 스크린쿼터 현행유보조차 지켜내지 못한 것은 이전에 한국 영화산업의 상황에 맞게 스크린쿼터를 운용하자고 했던 말의 진의를 의심케 한다”며 “스크린쿼터 폐지를 원하는 미국쪽의 요구를 몰랐다면 정부는 바보였던 셈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국민을 기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관광부의 후속 대책에 대한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다. 향후 5년 동안 30개 투자조합을 결성해 300여편의 한국영화 제작에 투자하겠다, 세제 지원을 통한 투자활성화 및 기금운용전문회사를 설립하겠다, 세계시장 진출을 위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제작을 위한 완성보증보험 제도를 도입하겠다, 한국영화의 부율 차별을 개선하겠다, 2011년까지 예술영화전용관을 70개로 늘리겠다, 영상물 불법복제 유통에 대한 상설 단속활동을 강화하겠다 등의 지원책을 내놨으나 영화계 안팎에선 “이미 스크린쿼터 축소 당시 정부가 서둘러 발표했던 내용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불신은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에 문화관광부의 조치가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영화진흥기금의 경우, 문화관광부는 극장쪽 등과 협의를 몇 차례 계속했으나 ‘관람료’ 인상 외엔 부족한 재원 마련 방안을 짜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은 “(문광부의 대책은) 산업에 대한 대책일 뿐 문화부문의 다양성 위축과 비용상승으로 인해 야기될 국민들의 피해에 대해선 전혀 고려가 없다”고 비판했다. 70년으로 저작권 보호기간을 연장하여 지불해야 할 로열티도 동시에 늘어나게 되면서 결국 “국민들이 져야 할 부담의 몫”은 커질 전망이다.
미국 기업 방송 채널 확보시, 국내 사업자 고사위기
한편, FTA 체결로 인해 예상되는 방송쪽 개방의 피해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협상에서 케이블TV 채널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을 폐지하기로 함으로써 타임워너, 디즈니 등 초거대 공룡 기업들의 한국 진출 발판이 마련됐다. 동시에 한국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편성쿼터는 느슨해졌다. 영화의 경우, 25%에서 20%로, 애니메이션은 35%에서 30%로 감소된다. 수입방송물에 대한 1개 국가 편성쿼터 제한 또한 현행 60%에서 80%으로 상향 조정됐다. 이제까지 미국영화는 한 채널에서 60% 이상 편성되지 못했다.
협상 결과에 대해 방송위원회는 “100% 직접투자를 허용해달라는 미국쪽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고, 협상 발효 뒤 3년 동안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지적이 높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양문석 사무처장은 “간접투자 100% 개방은 사실상 100% 개방을 뜻한다”면서 “미국의 미디어그룹이 한국에 100% 지분을 투자한 법인을 세운 뒤, 국내 채널사업자의 지분을 100% 사들이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콘텐츠를 제공하고 지분을 확보하는 현물투자 방식으로 경영권을 행사”하는 방식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해외투자를 얻어낼 기회가 늘어날 수도 있다”는 낙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온미디어의 한 관계자는 “간접투자를 100% 허용했으나 한국의 법이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다. 시장 또한 이제 수익을 거둬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기업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며 비관론을 경계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미미하고, 또 일시적일 뿐이다. 한-미 FTA 저지 시청각미디어 공대위는 “미국의 거대 미디어 그룹이 한국의 케이블과 위성방송에서 그들이 직접 소유, 경영, 편성, 운용할 수 있는 채널”을 갖게 됨으로써 한국의 채널사업자들은 “고사당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굴지의 미디어기업들이 시장에 뛰어들면 그들이 지닌 콘텐츠는 엄청난 무기로 변한다.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전규찬 소장은 “미국 기업들이 직접 회사를 차리고 방영권을 회수하기 시작하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고 말한다. 미국 기업들이 채널을 확보할 경우, 다른 한국 채널들에 손쉽게 콘텐츠를 내줄 리 없다는 것이다. 시청률 및 광고 싸움을 해야 하는 업체들로선 콘텐츠 확보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고, 결국 콘텐츠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것은 예상 가능한 상황이다. 프로그램 공급자뿐 아니라 종합유선방송 사업자들도 직접 경쟁에 뛰어들면 고액의 콘텐츠 비용은 결국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
공공성 파괴 우려, "미국 시스템으로 대체될 것"
문화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가장 우려하는 바는 시청각미디어 부문의 공공성 파괴다. “미국이 굳이 지상파 개방을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서이고, 또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규찬 소장은 한국방송공사도 결국엔 자본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공공성 확보를 위한 공영방송 체제는 미국적 시스템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기적으로 지상파 방송사들이 스스로 한국영화·애니메이션 등의 의무편성비율을 케이블 수준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는 민영화 주장을 내놓을 수도 있다.
“방송 등 문화산업 분야도 크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아쉬운 대목입니다. 문화산업도 이제 세계를 상대로 경쟁해야 합니다. 세계 중에서도 미국과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한-미 FTA 협상을 끝낸 뒤 노무현 대통령이 밝힌 대국민 담화의 일부다. 반면, 문화관광부와 방송위원회 등이 내놓은 협상 결과 발표 및 대책에는 미국의 전면 개방에도 불구하고 한국 협상단이 합리적인 안을 제시해 선방을 했다고 자찬하고 있다. 대통령은 지르고, 관료들은 달래는 것인가. 한국 영상산업과 영상문화가 초국적 자본을 위한 FTA 파고를 과연 견뎌낼지 두고볼 일이다.
전규찬 한-미 FTA 시청각미디어 공대위 위원장·영상원 방송영상과 교수 인터뷰
“더 못 내줘서 미안하다는 게 말이 되나”
-협상 체결 소식과 대통령의 담화를 듣고 분노했을 것 같다. =경악했다. 더 많이 못 내줘서 미안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방송위원회 발표를 봤더니 미국의 거센 요구에 비해 협상 결과는 ‘선방’했다고 평하던데. =협상 전략을 잘 짜서 신체가 갈기갈기 찢길 뻔한 위기를 막아냈다는데 그런 소리 들으면 기가 막힌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방송위원회는 공대위쪽에 ‘놀고 있네, 오버하지 마라’고 그랬다. 개방 요구도 없는데 괜한 걱정한다면서. 가만있으면 광풍 지나간다면서. 그런데 어떻게 됐나. 그냥 팔 한쪽 떼어낸 정도라고 하지만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 중상인지, 미국이 왜 그 정도에서 물러섰는지 이해를 못한다.
-미국의 방송 개방 요구는 협상 후반에 나왔다. =미국은 호주와 협상할 때도 그랬다. ‘예민 품목’ 아닌가. 처음엔 티를 안 내다가 나중에 몰아치는 거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의 경우, 지상파를 건드리진 않았는데. =미국쪽에서 머리를 굴린 것이다. 지상파는 건들지 말자. 벌집 쑤셔서 뭐하겠나. 또 그들도 국내 재벌사들인데. 지분 따먹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기다리다 보면 원하는 그림대로 될 것이라는 계산을 미리 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쪽 입장에서는 업계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만만한 케이블쪽을 내주자는 심산이었을 것이고.
-1국 편성쿼터 상향제의 경우 60%에서 80%까지 올렸다. =사실 영화채널 보면 60% 이상 편성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방송위원회가 규제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걸려도 경고 정도로 끝나니까. 다시 말하면 80%라고 하지만 실제 방영비율은 90% 이상 넘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상영할 만한 한국영화가 없다고 할 것이고. 후일 미디어 기업들이 방영권을 회수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똑같은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해도 수신료 등 소비자의 부담은 올라갈 것이다.
-FTA가 방송의 공공성을 훼손한다고 지적해왔는데.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기 어려워진다. 교양채널 등은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 지상파의 경우, 의무편성 쿼터를 내줬으면 했을 것이다. 개방과 함께 미국적 시스템으로 상업적 재구조화가 일어날 텐데 힘을 모아서 이를 혁신해야 한다.
-공대위 차원에서 계획하는 게 있나. =5월에 구체적 내용을 공개한다고 하는데 검증이 필요하다. 개방이 미디어를 둘러싼 지형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파악해야 한다. 저작권, 디지털콘텐츠, IPTV 등에서 알려지지 않은 단서조항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어떤 함의를 갖는지 캐내야 한다. FTA 반대 의견이 36%라는데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그들과 같이 할 것이다. 이미 주류 미디어들은 FTA 찬양 일색으로 돌아서 선전, 홍보를 하고 있는데 미디어 비판도 겸할 것이다. FTA 협상 결과의 국회 비준을 막기 위한 투쟁은 당연한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