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동네 은행에서 한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남자가 고객용 혈압기에 붙어앉아 몇 차례 혈압을 재는 걸 봤다. 살집이 많고 얼굴이 검붉었다. 허벅지 부위가 늘어난 베이지색 양복에 진분홍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 패션감각 좋지 않은 와이프에 애도 있는, 대출금을 갚거나 청약부금을 붓느라 벌이의 상당부분이 나가는, 시간과 실적에 쫓기는 외근 회사원 같았다. 혈압을 잴 때마다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높게 나왔나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타결되던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갑자기 주변의 모두가 불쌍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 가운데(근데 언제 31개국으로 늘었지? 지구가 이렇게 빨리 ‘선진화’ 되고 있다는 얘기야?) 우리나라는 노동 시간과 사교육비 지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이다. 하지만 자식 유명대 보내고 집 평수 늘리려고 아등바등대봤자다. 평균수명(24위), 보건지출(26위), 출산율(꼴찌), 고용율(21위) 등을 보면 인생 허무해진다.
협상 타결 결과를 보고하러 온(협상 내용이 아니라) 협상단 대표들에게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이 일부 신문의 표현을 빌려 “영웅”, “전사”로 추어올렸다. 한나라당에서는 “경제 6·29 선언”(김용갑) “대통령답더라”(강재섭)며 때아닌 ‘찬노통가’가 울렸다. 대통령에 버금가게 이럴 때 절대 안 빠지는 조갑제 아저씨는 “저항과 도전 정신의 소유자”, “초인적인 능력” 등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대통령을 칭찬했다. 방귀 좀 뀌고 사는 모두가 팡파르를 울려서인지, 타결 직후 대통령 지지율은 20%를 밑돌던 것이 확 뛰었다(<한겨레> 여론조사 결과 31.5%). 대통령도 이에 고무됐나 ‘호통 모드’다. “앞으로 반대할 분들은 객관적 근거와 합리적 논거를 갖고 해달라.” 그 말 그대로 그렇게 협상 내용을 평가하자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아닌 거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 자뻑하면? 소주에 새우깡 대신 (즉각 관세가 철폐되는) 냉동 오렌지 주스에 아몬드를 씹으며 혹은 포도주에 밀가루를 타 마시며 새벽 쓰린 가슴을 달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