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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주입식 인생, 주입식 몽타주
오정연 2007-04-13

아이는 울면서 뛰쳐나오고, 엄마는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딸의 손을 거칠게 잡아챈다. 노파는 덜컹거리는 경운기 뒷자리에 앉아있다. 짚단이 가득한 경운기를 모는 것은 아들일까, 가는 길에 그녀를 모셔다주는 동네 아저씨일까. 소년과 소녀가 산 속 어딘가로 향한다. 서두름을 감추려 씩씩함을 가장한 건지 소녀의 손을 잡고 앞선 소년의 어색한 걸음걸이. 아마도 그들은 오늘 안에 첫경험을 할 지도 모르겠다. 언덕 너머 기이하게 움직이는 뭔가가 있다. 알고보니 신형 풍차의 날개다. 바람에 맞서는 풍차가 온 벌판에 가득하다. 30년 가까이 침대 위에서만 생활한 사내가 외출길에서 마주한 풍경이다. 그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중이다.

<씨 인사이드>는 카톨릭 사회 스페인에서 안락사의 권리를 위해 법정투쟁을 벌인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다. 한가한 편에 속했던 어떤 주. 영화전문지 기자답게, 보고싶은 영화를, 느긋한 마음으로, 뭔가를 써야 한다는 부담없이 즐겨보자,는 목표로 향한 시사회였다. 사전정보 하나없이 보기 시작한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참 많이 울었다. 옆자리 관객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매우 잘 우는 나는 늘, 고작 이런 싸구려 정서에 호응하는 수준이란 말인가, 자책을 일삼는다. 극장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의 90%는 파블로프의 개라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때로 즉각적인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울컥해진다. 이를테면 위의 저 장면.

어둑한 하늘을 이고 사무실로 향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했다. 피로한 엄마는 사랑이 아닌 짜증의 매를 들었을 지도 모르고, 쪼글쪼글한 노파는 코앞에 다가온 죽음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인생을 보상받지 못했을 것 같고, 첫경험의 장소를 찾아헤매던 젊은 그들은 이후 싸우고 헤어졌을 게 분명하다. 심지어 그들이 모든 것이 가능한 날들을 모두 허비한 채 막심한 후회에 짓눌린다 해도 놀랍지 않다. 요컨대 그 몽타쥬는 인생이 아름답다거나, 소중하다는 암시를 던지지 않았다. 아무런 개연성도, 감정적 균형도, 연결고리도 없이 그저 어디서라도 마주할 수 있고, 보는 사람이 멋대로 상상할 수 있는, 툭툭 던져진 그 장면들.

일생을 정제하여 감동의 도가니를 만들겠다는 강박이 도처에 있다. 이를테면 보험 광고. 결혼, 출산, 입학, 졸업, 입대 등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인생의 마디를 묘사하는 장면마다, 활짝 웃거나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인물들은 당연하다는 듯 주변인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현한다. 화해를 거부하는 가족이 있고,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은 생명이 있음을, 짐짓 외면하는 몽타주. 당연하다. 그 CF의 목적은 정해진 인생을 준비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싸움 뒤의 화해를, 패배 뒤의 극복, 심지어 결혼과 출산과 입학을 당연시하는 순간, 그렇지 못한 싸움과 패배, 그것들을 경험하지 않는 인생을 받아들일 수 없어지는 것이 나는 두렵다. 삶을 사랑하기 위해 죽음을 갈구하는 <씨 인사이드> 속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닥 아름답지 않았지만, 박제되지도 않았다. 아무리 좋게 봐도 삶의 90%는 행복과 감사가 아니라 절망과 후회다. 그러나 세상의 바람을 맞고 두 발로 선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결론은, 개인이 내리는 것이다. 무조건 삶이 아름답다는 환상은 세상이 다수결로 무조건 강요하기엔, 지나치게 새빨간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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