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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지독한 놈, 괴물 같은 놈,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

피로에 찌든 <우아한 세계>의 인구처럼, 인터뷰 장소에 들어선 송강호의 얼굴엔 붉은 열꽃이 번져 있었다. 무리한 일정 중 으슬으슬 스며온 몸살 기운이 이상하게 오래가고 있었다. 무려 네편의 영화가 개봉 또는 크랭크인하는 2007년, 지금 송강호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다. 공교롭게 <우아한 세계>와 <밀양>의 촬영이 겹쳐 강행군을 감당했던 그의 앞엔 두 작품의 홍보 일정과 김지운 감독의 웨스턴 대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리허설이 대기 중이다. <좋은 놈…>이 6개월에 걸친 국내외 촬영을 모두 마무리하면 곧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촬영을 개시할 것이다. 그간 1년에 한편꼴로 출연해온 송강호로서는 이례적인 행보다. 몰아치는 일정을 견뎌내려 얼마 전엔 난생처음 링거주사도 맞았다. 괴로운 마찰음을 내는 쉰 목소리가 안타까웠지만,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수척해진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명민한 감각을 빛내기 시작했다.

한재림 감독의 신작 <우아한 세계>의 ‘인구’는 명색은 조폭 중간보스지만 실체는 샐러리맨과 다름없는 대한민국 평균 남성이다. 과중한 업무와 가족의 몰이해 속에 일상의 쳇바퀴를 도는 40대 가장이 ‘충무로의 괴물 배우’ 송강호의 얼굴을 빌려 스크린에 재현된다. 일상에 천착해 섬세한 여운을 포착하는 이번 작업엔 <괴물> <살인의 추억> 같은 선 굵은 전작들에 못지않은 고충이 있었다.

<우아한 세계> 개봉을 앞두고 잠시 짬을 낸 그는 이날의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홍콩으로 휴식차 떠났다. “머리를 식히러” 지인들과 가볍게 다녀오겠다며 떠난 그날, 제1회 아시안필름어워드(일명 홍콩영화제)가 유덕화, 와타나베 겐을 제쳐두고 첫 번째 남우주연상을 그의 품에 안겼다. 아시아의 러브콜에 올 한해가 더 바빠지는 건 아닐까. 2007년의 활주로를 내달리며 또다시 비상의 바람을 타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몸은 괜찮은지. 또 링거 맞고 온 거 아닌가. =다음에 한번 더 맞아야지, 이번엔 좀 센 걸로. (웃음)

-그동안 정말 바빴다. 앞으로도 그렇지만. =<우아한 세계> 끝나자마자 두달간 밀양에 계속 가 있었고, 끝나자마자 다시 올라와 <우아한 세계> 후시녹음을 했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리허설도 들어가고. 어제는 모처럼 일정이 없어 푹 잤다. 홍콩 갔다오면 바로 <우아한 세계> 홍보 일정 시작해야지. 그럼 이제 개봉까지 또 정신없다. 올해는 계속 그럴 거다.

-<우아한 세계>를 시놉시스만 나온 단계에서 선택했다. 그만큼 확신이 있었나. =예전에 한재림 감독의 데뷔작 <연애의 목적>을 인상깊게 봤다. 멜로라는 게 환상이 많고 현실과 괴리가 있지 않나. 그런데 <연애의 목적>은 연애 얘기를 겉멋없이 현실적으로, 그러면서 재미있게 풀더라. 신인감독 작품이 휩쓸리기 쉬운 과도한 자의식도 보이지 않았고, 내공이 있더라. 믿음이 갔다.

-‘생활누아르’라는 독특한 수식이 붙었다. 이번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 =누아르영화의 형식미와 정반대로 가는 영화다. 너무 리얼해서 생경할 정도로 사실적인 일상을 그린다. 조폭이 주인공이지만 물론 <우아한 세계>는 조폭 문화를 리얼하게 탐구하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애초 한 감독이 설정한 주인공은 회사원이었다. 보통 40대 남성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원치 않는 일에도 휘말리고 순수한 마음을 배신당하기도 한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자기 마음대로 살기 힘든데,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우아한 세계’라면 현실엔 그런 건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조폭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겐 당신이 표현한 아버지의 애환이 인상깊은 듯하다. 하지만 본인은 이 영화를 ‘아버지 영화’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 영화’란 표현은 가족영화처럼 들려서 쓰기 좀 조심스럽다. 그럼 뭐냐, 하면 그냥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한 남자가 인생에서 겪는 사회에서의 좌절, 인간적인 고뇌가 중요한 것 같다. ‘가족’도 ‘조폭’도 초점은 아니다. 어떤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 아닐까. 이런 관점은 기존 한국영화에서 드물지 않나.

-전작들에서 당신은 아이들을 곧잘 잃곤 했다. 이번엔 아이들에게서 외면받는 아버지다. =전작들에선 영화에 따라 선명하게 캐릭터가 규정된 아버지였다면 이번엔 가장 평범한 아버지다.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가장 정상적이고 현실감있는 아빠가 아닐까. 영화 속의 아이들은 사춘기지만 내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나 자신이 인구처럼 외면당한 경험은 없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아주 현실적인 얘기가 아닌가.

-촬영하며 힘들었던 점은. =특별히 없지만, 작품 특성상 이런 연기가 더 어렵긴 하다. 모르는 사람들은 <괴물> <살인의 추억>처럼 이른바 ‘센’ 영화들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정말 힘들지만 그 ‘센’ 상황 덕분에 오히려 연기하기는 더 쉬울 수 있다. <우아한 세계>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장면을 만들려면 오히려 더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상적이라도 두 시간짜리 영화로서의 에너지는 유지해야 하니까 한 호흡이라도 소모돼선 안 된다. 굉장한 영화적 장치가 있는 전작들과 달리 그 빈 공간을 연기과 연출력으로 채워가는 작품이라 배우로서도 두배는 더 힘들었다.

-<우아한 세계>까지 13편의 영화를 했다. =맞나? 잘 모르겠다. (중얼중얼하며 손으로 꼽다가 포기) 모르겠네.

-이제 영화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신중히 생각하며 고를 것 같다. =의식하고 고르는 건 아니다. 배우라는 것이 1, 2년 하고 종료되는 일이라면 ‘이번엔 멜로 했으니, 다음엔 액션도 하고 사회드라마도 해보고 싶다’는 식으로 접근할 것이다. 하지만 배우란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가는 일이다. 그러니 굳이 전작들을 감안하며 작품을 고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올해만 출연 작품이 네편이나 된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발걸음이 급해졌다. =내가 작품을 택하는 기준은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작품들이 내가 원하는 적절한 타이밍에 딱딱 차례로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흥행이나 작품성 면에서 대부분 좋은 선택을 해왔다. 시나리오에서 어떤 점을 보는가. =시나리오는 이제 내게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영화를 막 시작했을 땐 ‘아… 이게 어떤 얘길까, 어떤 캐릭터일까’ 하는 문제가 제일 중요했는데 이제 십 몇년을 해보니 영화가, 우리네 삶의 얘기가 과연 매번 그렇게 극적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단순하고 일상적인 얘기를 통해서도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영화다. 그래서 이제 시나리오에서 대단한 사건이나 인물을 찾으며 선택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선택의 기준은. =기준이라면 사람들이지. 감독일 수도 있고…. 이 사람들이 왜 이 작품을 만들려고 하나, 또 어떻게 만들려고 하나,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시나리오 거,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의 의미는, 글쎄, 지금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

-어느 때보다 바쁜 한해가 되겠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리가 많을 텐데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나. =스트레스 관리? 못하지, 그냥 짊어지고 갈 수밖에! 안 그래도 바쁜데 스트레스 관리할 시간이 있겠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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