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 디자인> 김민수 지음/ 그린비 펴냄
9·11 발생 8일 뒤, 뉴욕 <데일리 뉴스>와 함께 밀턴 글레이저의 포스터 수백만부가 배포되었다. 글레이저가 자신의 1975년판 원형을 재해석해 9·11 테러 되새김용 캠페인으로 유포한 이 포스터는 곧 지하철 벽면과 우체통 등 공공장소와 시설물 곳곳에 붙여져 포스터로서 공공성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I ♥ NY MORE THAN EVER’, 즉 ‘어느 때보다 더 뉴욕을 사랑한다’는 문구 때문만이 아니라 맨해튼에서 세계무역센터가 있었던 위치에 해당하는 하트 안에 혈흔을 그려넣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처난 심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치유를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곳의 상처를 인정하는 것이다.” <필로 디자인>은 글레이저와 같은 여러 디자이너들의 사례를 통해 자본과 기술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버린 21세기의 화두로 ‘인간’을 제시한다. 낭만적이거나 복고적인 정서의 발로는 아니다. 디자인의 역사는 디자이너들의 작업의 기록이자 그들의 삶과 철학이 밀어낸 기록으로, 디자이너들의 삶과 철학의 역사를 읽음으로써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은 구체적으로 여러 디자이너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들을 통해 증명된다. 김민수가 문화를 읽기 위해 선택한 것들은 웹사이트, 대중잡지, 휴대폰, 냉장고, 자동차, 패션, 건축과 같은 문화적 텍스트. 이런 문화적 텍스트의 혈을 짚어 진맥함으로써 유기체로서의 문화의 상태를 가늠하고자 한다.
베이징올림픽 엠블렘 디자인을 통해 다가가는, 중국 디자이너들에게 어머니가 되어준 20세기 초의 인물은 놀랍게도 소설가 루쉰이다. 루쉰은 자신의 책 디자이너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고루한 회화풍의 표지와 삽화에서 벗어나 책의 본문 내용과 통합된 구조와 구성을 이루는 근대적 감각의 책을 내놓았고, 또한 중국적 특색이 담긴 목판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김민수가 한국 최초의 멀티미디어 디자이너로 소개하는 시인 이상 이야기도 흥미롭다. 난해하다고 알려진 이상의 실험시가 기실 이상이 건축가였던 시절 창작했던 것들이며, 오늘날에 이르러 ‘비트’(bit)로 설명되는 사이버스페이스 문화는 이상의 시어에 등장했던 ‘광선’과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결국 이상의 시가 보여주는 세상은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사고와 발상이라는 것이다.
<필로 디자인>은 이미지를 글로 풀어내면서도 이미지 그 자체를 가능한 한 다양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박물관에만 남아 있는 디자인이 아니라 오늘날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책 디자인이나 뉴욕, 도쿄, 그리고 서울에 이르는 대도시의 중심에 존재하는 건축물에서 그것을 창조한 디자이너를 읽고 그 이후의 사회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살핀다. 한국어로 ‘옮겨진’ 게 아니라 한국어로 ‘쓰인’ 재미있는 디자인 이야기를 오랜만에 만나는 즐거움을, <필로 디자인>은 맛보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