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이 죽었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희미한 권력의 향내는 어김없이 나게 마련이어서 비탈길 비포장도로를 자전거 타고 가다 미끄러져 죽은 전임 이장 대신 새 이장을 누구로 할 것인지로 마을은 잠시 술렁인다. 그러다가 아무 생각없던 조춘삼(차승원)이 이장이 된다. 유망한 후보자들 그러니까 나이 지긋한 40, 50대 형님들 몇몇이서 머리를 맞대고 자기들 중 한명이 이장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숙덕거리던 그때 옆에 있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이번에는 좀 젊은 놈을 뽑아”라고 불호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그럴 만한 젊은 놈은 서른일곱 조춘삼뿐이다.
이장 노릇 중 하나가 선거철 벽보 붙이기다. 선거에 출마한 군수 후보들의 포스터를 붙이다가 조춘삼은 거기서 낯익은 얼굴 하나를 본다. 노대규(유해진).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동창생, 이라기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못할 것 같은 녀석. 이 녀석은 초등학교 내내 반장이던 내 밑에서 부반장이나 하던 놈이 아닌가. 이 녀석이 군수가 되겠다고 나섰다니. 당선될 리가 없다. 만약 노대규가 군수에 당선되기라도 하면 내가 읍내 술집에 가서 한턱 크게 쏘겠노라 조춘삼은 마을 형님들을 향해 악으로 깡으로 호언장담을 한다. 노대규가 한표 차로 강덕군의 군수가 된다.
그 뒤로 마을 길 포장 문제를 놓고 조춘삼은 노대규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그나마 옛정을 생각해서 들어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노대규는 조춘삼의 마을에 포장도로를 놓아주기로 결정한다. 조춘삼은 그렇게 해서 마을 사람들에게서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한술 더 떠가며 바쁜 군수를 붙들고 친한 친구 행세를 하려다가 낭패를 본 조춘삼은 안 그래도 배가 꼬이고 오기가 끓어오르는 참에 아예 노대규를 끌어내리려는 반대 진영에 앞장서기로 한다. 노대규가 강덕군의 발전사업으로 유치하려는 방폐장 사업을 막기 위해 나선 마을의 부패한 유지들과 손을 잡는다. 그들은 이제부터 친구가 아니라 그냥 아는 적이다.
패러디영화 <재밌는 영화>를 만들어 데뷔했던 감독 장규성은 두 번째 작품부터 자신의 관심과 전공이 사실 패러디에 있지 않음을 표방한다. 돈 봉투를 받아들다가 들켜 강원도 어느 시골로 강제 전근 배치되어 생활하는 <선생 김봉두>의 극적인 인간 다시 태어나기 프로젝트를 두 번째로 만들더니, 노처녀 여선생과 성숙한 초등학교 여제자가 미모의 젊은 남자 선생을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되는 <여선생 vs 여제자>를 만들었고, 이번에는 어린 시절 초등학교 반장과 부반장 관계이던 두 사람이 성인이 되어 전세가 역전된 상황으로 만나 앙숙이 된다는 내용의 <이장과 군수>를 만들었다.
고집인지 한계인지 모르겠으나 장규성은 ‘누구와 누구’, ‘무엇 대 무엇’이라는 조촐한 이분법 혹은 대립 구조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선생 김봉두>에서 서울은 강원도의 반대말처럼 존재하는 동시에 선생과 아이들은 안 보이는 대결 구도 안에 있다. <여선생 vs 여제자>는 그 흔하고 무심한 사제지간이 아닌 난처한 연애의 대결자들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마을에서 같이 컸던 조춘삼과 노대규 즉 이장과 군수가 서로 대립한다. ‘누구 대 누구’, ‘무엇과 무엇’이 서로 툭탁거리며 소동을 일으키는 이야기는 사실 실제에서라면 말이 안 될 것이다. 돈을 밝히는 것에 인생을 걸었던 선생은 시골에 남아 아이들을 사랑하기 어려울 일이고, 좀 나이가 들긴 했어도 아무래도 여선생은 초딩 여제자보다는 그 남자를 더 쉽게 차지할 가망이 높을 것이고, 보나마나 이장은 군수에게 대들 만한 위치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들에서는 그 무모한 대결과 소동이 평등한 차원에서 가능해진다. 무엇보다 그건 양쪽을 놓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데 재미있게도 양쪽 모두 조금씩은 모자란 구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며, 그 모자람을 부드러운 시각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항상 그 안에 있다. <이장과 군수>에서도 (영화에 의하면) 외모는 훌륭하지만 성격은 다소 덜떨어진 이장 역을 차승원이 맡았고, (역시 영화에 의하면) 얼굴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으나 성품은 대쪽같이 곧은 노대규 역을 유해진이 한다. 누구와 누구 중 특별히 더 잘난 인물은 없고 그 둘 모두 밉지 않은 결함을 갖고 있다. 그 둘이 싸우니 사태는 언제나 어설프고 또 회복 기미다. 그게 <이장과 군수>에 있는 기운이고, 이 영화를 연출한 장규성 영화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분위기다. 영화는 이들의 싸움에 막상 불을 붙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어떤 긴장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욕심을 내서 일을 더 추가하지도 않는다. 그 점에서 장규성의 영화에는 감당 못할 덫을 늘어놓으며 점층적 효과를 보려는 어떤 코미디영화들과는 좀 다른 소박함이 있긴 하다. 자기의 인물들이 감당할 수 있는 지점까지만 혹은 회복이 가능한 수위까지만 가다보니 상상력이 비교적 소극적이며 세심함이 부족하고 사건들은 심심하게 남지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격차를 넘어서던 대립조차 끝내 해피엔딩으로 맺어질 것이라며 은근히 기다리게 되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노대규에 맞서 벌이는 조춘삼의 행각은 하나같이 치밀하지도 않고 실수투성이인데 게다가 조춘삼이 그러는 동안 노대규는 조춘삼을 그다지 미워하는 것 같지 않다. 결국에 <이장과 군수>는 조금 덜 완벽하지만 관계의 회복에는 성공하는 농촌 훈남들의 우정에 관한 영화가 된다. 여선생과 여제자가 화해하고 김봉두가 진짜 선생이 되어가는 과정처럼.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장규성은 인정미담의 이야기를 항상 전원미담의 이야기와 등치해 풀어낸다. 누구 대 누구가 서로 모자란 평등의 관계인 것에 비해 도시와 시골은 거의 직설적일 만큼 적대적이다. 화해의 기적은 대도시의 네온 불빛 아래서 일어나는 법이 없고 적어도 지방 소도시 안에 남는 자의 몫이다. 만약 그곳이 깊은 시골이라면 들길과 흙먼지 속에서 어릴 적 친구의 우정으로 되돌아가는 복구가 일어난다. 그래서 <이장과 군수>를 본다는 건 헐렁한 리듬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귀농일기의 한 소절을 읽거나 듣는 느낌이며 혹은 속물적 경쟁과 논리없는 화해와 아련한 향수로 뒤범벅된 어느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동창회 자리에 끼어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