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어느 날 서울종합운동장 광장에 느닷없이 대형 천막이 들어섰다. 그리고 노랑과 파랑으로 알록달록하게 장식된 이 천막은 요정의 손길이라도 빌린 듯 천천히 솟아올랐다. 이곳의 주인은 캐나다에 뿌리를 둔 세계적인 공연단체 ‘태양의 서커스’. 두바이를 환호하게 만든 데 이어 서울을 방문한 이들은 3월29일 처음으로 한국 손님을 불러모아 정성껏 준비한 공연 <퀴담>을 선보일 예정이다. 탄성은 달궈지지 않았고 감격의 눈물도 채 맺히지 않았지만 어떤 공연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 공연의 시작을 고대하는 사람들, 포스터를 훔쳐보며 궁금해한 사람들 혹은 삭막한 도시를 잊고 잠시나마 백일몽에 젖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여기 태양의 서커스와 <퀴담>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서커스에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 난쟁이 혹은 키다리의 등장, 야생성을 잃은 듯한 동물들의 묘기, 중력의 법칙을 위반하는 곡예적인 동작, 지나치게 기교적인 아이들의 춤과 표정까지. 서커스가 지배하는 밤은 정적이고 침착한 낮의 규칙을 거스른 채 분노와 슬픔, 기쁨과 괴로움, 환희와 절규를 극대화한다. 그리하여 서커스단의 천막은 혼란스런 축제의 감정을 불러내 즐거이 뛰노는 한밤의 놀이터로 변모한다. <퀴담>은 전통적인 서커스의 정수를 버리지 않되 서커스라는 장르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한 종합예술공연이다. 공던지기, 줄넘기, 공중곡예 등 서커스 하면 떠올릴 프로그램을 모두 갖췄지만 콘서트, 현대무용, 발레, 마임, 마법,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과 결합한 이들 요소의 면면은 한편으로 단순히 서커스라고 부르기엔 색다른 느낌이 강하다. ‘시르크 뒤 솔레유’(Cirque du Soleil), 한국말로 태양의 서커스라는 명칭의 공연 단체가 창작한 아홉 번째 작품 <퀴담>은 199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초연된 이래 16개국에서 1천만명 이상 관람한 히트 서커스다. 공연의 제목이자 등장인물의 이름이기도 한 ‘퀴담’(Quitam)은 라틴어로 ‘익명의 행인’ 혹은 ‘거리를 서성이는 외로운 존재’를 뜻하는 단어. 이를 통해 <퀴담>은 소외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되새김질하는 백일몽이나 공상을 불러내려 한다.
서커스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다
그렇다면 흔히들 ‘아트서커스의 정수’ 혹은 ‘21세기적인 공연의 대표’라고 일컫는 <퀴담>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이 공연의 모태인 태양의 서커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양의 서커스의 창립자는 아코디언 연주가이자 죽마 곡예, 불 묘기에 능했던 공연예술가 기 랄리베르테. 14살 무렵 캐나다를 떠난 랄리베르테는 온갖 공연을 선보이며 세계를 떠돌다 퀘벡으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또 다른 공연예술가 질 스테-크루아를 만나 1982년 거리공연 축제조직을 만든다. 그리고 1984년 마침내 퀘벡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하와이 해변에서 만끽했던 붉은 석양처럼 젊고 활기있는 서커스단을 소망하며 태양의 서커스를 조직한다. 현재 태양의 서커스가 <퀴담> <오> <카> 등 13개 공연으로 세계 100여곳에서 벌어들이는 연간 매출은 5억달러가량. 기존 서커스 업계에서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았던 ‘링링 브러더스 앤드 바넘 앤드 배일리’가 100년 넘게 모은 수입을 20년 만에 돌파했다니 그 성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때 60여명 단원이 전부였던 이 조직은 근래 800명의 연기자를 포함해 3천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성장했으며, 베스트셀러 <블루오션 전략>에서 대표적인 블루오션 전략의 성공사례로 손꼽히는가 하면 <초일류브랜드100>의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불가능이란 단어일 뿐이다’(Impossible is only a word)라는 꿈같은 모토가 현실화된 데는 끊임없이 자기개발에 힘쏟고 라이선스 공연없이 오리지널 공연만을 선사하며 다른 서커스 회사가 아닌 스포츠를 포함한 엔터테인먼트 사업들과 경쟁하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이 보탬이 됐다.
태양의 서커스가 주관하는 공연들은 또한 동물 묘기를 지양하고 오롯이 신체의 움직임만 이용해 온갖 눈요깃거리를 빚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전의 서커스가 어린이를 주요 관객으로 삼았다면 이들은 어른 관객을 겨냥해 음악, 조명, 분장, 의상, 춤 등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더욱 발전적인 개념의 공연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는 다른 공연에 비해 어두운 색채가 한층 짙은 <퀴담>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특징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은 어두컴컴한 거실의 불을 켜는 작은 소녀 조이(Zoe)와 의자에 앉은 채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부모. 어둠에 가려진 갖가지 무대 장치들, 이를테면 동그란 회전 무대나 27m에 이르는 대규모 컨베이너, 5개의 레일을 활용한 천장의 설비 등은 관객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장면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신문을 읽는 아버지와 라디오를 듣는 어머니는 딸에게 무심하고 조이는 반복적인 일상이 괴롭다. 바로 그때 트렌치코트를 입고 파란 중절모와 우산을 손에 쥔 퀴담이 나타난다. 어찌된 영문인지 코트 위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르네 마그리트 그림 속 인물을 닮은 퀴담은 들고 있던 중절모를 조이에게 건넨 뒤 사라진다. 조이가 그 모자를 자신의 머리에 올려놓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점점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던 기괴한 캐릭터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낸다. 이른바 마법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어른을 위한 서커스 혹은 마법의 세계
<퀴담>에서 벌어지는 유희는 총 10개의 에피소드를 따른다. 저먼 휠(German Wheel), 중국식 요요가 등장하는 디아볼로(Diabolos), 실크를 활용한 공중곡예인 에어리얼 컨토션 인 실크(Aerial Contortion in Silk), 줄넘기 프로그램인 스키핑 로프(Skipping Ropes), 공중후프곡예인 에어리얼 후프(Aerial Hoops), 그리고 광대들이 선사하는 한바탕 쇼가 벌어진 다음 두손을 이용해 균형을 잡는 핸드밸런싱(Handbalacing), 밧줄을 이용한 공중곡예인 스패니시 웹(Spanish Webs), 남녀 한쌍이 온전히 서로에게 기대 포즈를 완성하는 스태튜(Statue), 그네를 활용한 공중곡예인 클라우드 스윙(Cloud Swing), 연기자들이 서로를 던지고 받는 뱅퀸(Banquine)이 차례대로 이어진다. 기존의 묘기를 적절히 활용하는 한편 구태의연한 설정을 버린 이들 에피소드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연기는 디아볼로, 에어리얼 컨토션 인 실크, 스태튜, 뱅퀸 등. 우선 디아볼로는 키가 큰 서양 연기자 무리에서 단연 돋보이는 깜찍한 동양 소녀들이 선사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무로 만든 요요를 줄에 얹어 막대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민첩함과 정확성을 자랑한다. 에어리얼 컨토션 인 실크는 천장에서 아래로 늘어뜨린 붉은 실크 자락에 온몸을 지탱하는 연기다. 피부색과 비슷한 옷을 입어 벌거벗은 듯한 여성 연기자가 실크 속에 자신을 숨기거나 다리를 감은 채 등을 젖히는 모습이 아름답고 아찔하다. 반면 ‘석상’이란 뜻의 스태튜는 그야말로 힘과 균형미가 엿보이는 서커스의 하이라이트다. 한 덩이로 모여든 연기자들 틈에서 솟아오른 남녀가 서로의 팔이나 등, 다리에 의지한 채 바닥과 수평 또는 수직을 이루는 동작들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현대사회의 인간상을 은유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 다채로운 사연을 품은 캐릭터들이 나타나 각 에피소드를 연결한다. 퀴담의 모자로 시공을 넘나드는 조이와 전형적인 사업가 타입의 아버지, 붉은옷과 달리 차가운 표정을 짓는 어머니 외에도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퀴담 세계의 인도자인 존(John). 머리에 뿔이 돋아난 그는 익살스런 묘기를 시연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이른바 ‘분위기 메이커’인 동시에 아버지의 흰 구두를 훔쳐 신으며 이야기를 열고 이를 돌려주며 이야기를 닫는 사회자 역할도 도맡는다. 한편 가슴에 과녁이 그려진 타깃(Target)이 존처럼 유쾌한 캐릭터라면 권투 글러브를 끼고 주먹을 부풀린 붐-붐(Boum-Boum)은 천둥 소리를 몰고와 간담을 서늘케 하는 무서운 캐릭터. 귀가 유난히 긴 래빗(Rabbit)과 뼈만 남은 날개를 지닌 에비에이터(Aviator)는 정신없이 무대를 휘젓고 머리 전체를 투명한 천으로 감싼 베일을 쓴 여인들(Veiled Women)은 때마침 공연되는 클라우드 스윙에 맞춰 로프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한다. 큰 못이 박힌 왕관을 쓰고 흰옷을 늘어뜨린 자유의 영혼 역시 인상적이긴 마찬가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몰고 등장한 그녀는 우아한 사위로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듯 퇴장한다. 이처럼 무대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쉴새없이 뛰어다니는 이들 캐릭터는 색다른 매력을 뽐내며 2시간30분가량의 공연에 몰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것은 하나의 꿈에서 시작했다
그 밖에도 5천여평의 부지에 설치되며 2500여명을 수용 가능한 거대한 천막인 그랑 샤피토(Grand Chapiteau), 각 캐릭터의 사연에 걸맞게 섬세하게 덧입혀지는 분장, 수작업으로 만든 250여벌의 의상과 500여개의 소품, 200여 켤레의 신발과 30여종의 모자, 연기자의 몸놀림을 돋우는 화려한 조명과 라이브 음악 역시 퀴담의 세계를 부각하는 요소들이다. 특히 공연의 테마에 따라 새로이 창작되며 베이스, 색소폰, 키보드, 바이올린, 첼로, 기타, 드럼 등을 이용해 즉석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2004년 음반사 시르크 뒤 솔레유 뮤직을 따로 차려 음반까지 제작할 정도로 이들이 신경쓰는 부분. 더군다나 음악에 맞춰 흘러나오는 조이와 남자 보컬의 노래는 공연의 처음과 끝에 낭독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 카르마, 카르마”(What is right, and what is wrong. Karma. Karma)라는 문장을 제외하곤 놀랍게도 작곡가가 지구상의 갖가지 언어를 뒤섞어 새롭게 창조한 말로 가사를 붙인 것이다. 이는 듣는 사람의 국적에 따라 터키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 때로는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 등으로 달리 들릴뿐더러 그 의미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까닭에 전체 공연에 한층 기묘한 분위기를 드리운다.
‘그것은 하나의 꿈에서 시작했다.’(It all started with a dream) 서커스를 넘어선 서커스 <퀴담>, 나아가 태양의 서커스라는 기묘한 서커스단은 사실 기 랄리베르테라는 괴짜의 꿈에만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전세계를 떠돌며 희망의 씨앗을 그러모은 그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야심가이자 모험가였기에 마침내 그 과실을 거둘 수 있었다. 일상에 지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퀴담>의 여주인공 조이 또한 무서운 그림자를 앞세우고 나타난 퀴담의 파란 중절모에 선뜻 손을 내민다. 그리고 빨강 구두를 신은 도로시처럼 하얀 도끼를 뒤쫓는 앨리스처럼 겁없이 여행을 떠난다. 어쩌면 <퀴담>의 세상에선 우리도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퀴담>은 손을 저어 쫓아버리기엔 너무 달콤하고 매혹적인 마법이다.
태양의 서커스에서 벌이는 상설 공연들
언제라도 볼 수 있는 크고 멋진 쇼
태양의 서커스는 근래 공연의 메카로 떠오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만 다섯편의 상설 공연을 열고 있다. 가장 먼저 MGM 그랜드호텔에서 벌어지는 <카>(Ka)는 전쟁의 발발로 헤어져 자란 쌍둥이 이야기를 담는다. ‘Ka’는 ‘서로 다른 것’이라는 뜻의 이집트어. 1850억원의 제작비 중 14%를 투자한 웅장하고 세심한 무대 장치가 인상적이다. 360도 회전하거나 100도로 기울기도 하는 메인 무대에선 무협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대한 액션신이 펼쳐진다. 연기자들이 무대 아래로 떨어진 뒤 물속 세계를 유영하는 듯 헤엄치는 모습은 특히 잊기 힘든 장관. <버라이어티>에서 “이 이상 크고 멋진 쇼는 없다”고 평하기도 했으며 2005년 2월 초연됐다. 반면 벨라지오 호텔에서 시연되는 <오>(O)는 최장폭 25m, 수심 5m의 수영장이 들어선 무대를 자랑한다. ‘물’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Eau’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이 공연은 18m 높이의 천장에서 수직하강하는 고공 다이빙,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공중곡예를 비롯해 물을 이용한 묘기를 선보인다. 74명의 연기자가 참여하며 1998년 초연된 이래 3천회 이상 공연됐다. 한편 뉴욕뉴욕호텔에서 벌어지는 <주매니티>(Zumanity)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그린 성인용 쇼다. ‘Zumanity’는 동물원의 ‘Zoo’와 인간성을 뜻하는 ‘Humanity’를 한데 엮은 합성어. 성에 대한 선입관을 깨부수는 강렬하고 에로틱한 서커스로 평가받는다. 가장 최신작으로 미라지호텔에서 열리며 비틀스 음악을 도입한 공연인 <러브>(Love)가 있다. 기 랄리베르테와 비틀스 멤버인 조지 해리슨의 친분을 토대로 성사된 이 서커스는 비틀스의 음악들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다양한 묘기와 장치를 앞세워 비틀스의 일대기를 그린다. 2006년 6월 초연됐다. 마지막으로 트레저 아일랜드 개관과 함께 전용극장을 세운 <미스테르>(Mystere)는 13년째 장기 흥행을 하고 있는 작품.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우러나며 한국의 널뛰기 문화에서 차용한 듯한 설정이 눈에 띈다. 이외에도 미국 월트 디즈니 월드 리조트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상설 공연으로 <라 누바>(La Nouba)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