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희극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종잡을 수 없는 괴물이 등장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오래된 <매드>(Mad) 잡지 더미에 비견할 만한 무정부적 난장판을 보여준다. B급 감성의 익살이 가득한 광대극으로서 봉 감독이 만들어낸 첨벙거림 자체가 일종의 괴물이라 하겠다. 이 영화는 한국 역사상 최고 수익을 거둔 영화이다. 지난 5월에 칸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관객은 마치 라면을 먹듯 이 영화를 후루룩 소리내며 마셔댔다.
<괴물>의 주요한 매력은 공중제비를 하는 육식성 돌연변이 점액질 덩어리에 있다. 잡지 <매드>가 한때 ‘더미’(Heap)라 불리는 쓰레기더미에 생명을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괴물>은 강탈당한 땅의 입속에서 끄집어져 나온 점액질 덩어리를 제시한다. 이 살인 올챙이는 물고기처럼 수영할 수 있고, 곤충처럼 겅중거릴 수 있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맹금류처럼 뛰어다닐 수도 있다. 1933년 제작된 <킹콩>보다 더 심하게, 봉 감독이 만들어낸 괴물은 고정된 크기도 없는 초현실적인 개체이다. 공포가 구체화된 모습으로서 이 이름없는 괴물은 방사능에 오염된, 불을 뿜어내는 고질라보다도 더 정의내리기 어렵다. 괴물은 공포의 ‘극치’인 것이다.
괴물, 공포의 모습
봉 감독의 알레고리는 신중하게 짜여진, 자유롭게 표류하는 상징이다. 괴물이 미국인의 무지함과 오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주한미군 기지 실험실에서 벌어진 <괴물>의 도입부에서 분명하게 언급된다. 사용하지 않는 포름알데히드 병에 쌓인 먼지에 화가 난, 거들먹대는 미군 장교는 불운한 김씨에게 유독성 화학물질을 하수구에 쏟아버리도록 하고 그것은 한강으로 흘러든다. 몇년이 지나고, 낚시꾼 두명이 육중한 무언가가 진흙탕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뒤 한강 둔치 가판대에서 장사를 하는 엉뚱하고 비정상적인 가족에게로 컷이 옮겨간다. 박씨네 일가는 연장자인 가부장 박씨와 빈둥거리기만 하는 두 아들- 느려터진 아들 하나와 술에 취해 사는 아들 하나- 과 국가대표 양궁 선수였으나 불행히도 심리적 장해를 가진 딸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만 11살짜리 손녀딸 현서가 있다. 게으름뱅이 아들은 강 저 아래로 소풍객이 다리 아래에 걸려 있는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구운 오징어를 집어먹기 바쁘다.
‘공포의 극치’인 괴물은 물로 떨어져서 헤엄쳐 지나간다. 평범한 시민들은 평범한 시민답게 별 염려도 없이 이 알 수 없는 대상에게 쓰레기를 던진다. 괴물이 로켓처럼 강변으로 뛰어들어 추격전- 괴물이 쿵쾅거리며, 이것저것을 낚아채고, 껑충거리는 도마뱀으로 변모하는 과정- 을 벌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뒤이어 나오는 모든 것들 가운데 단연 으뜸을 차지하는, 시끌벅적한 공포의 경쾌하면서도 의기양양한 영화의 어조는 9·11 사건이나 혹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오데사 계단’(Odessa Steps)을 희화화해서 만든 재연이다. 추격전이 끝난 뒤, 괴물은 거위 모양의 배들을 흩트려버리고, 어린 현서만을 물고기처럼 생긴 품에 달고서 다시 강 속으로 입수한다. 이 다음부터 영화는 개인적인 것으로 채워진다.
바이러스의 숙주는 괴물인가 한국사회인가
<고질라>의 일본 원판과 마찬가지로 <괴물>은 재앙에 자연주의적인 색채를 넣는다. 괴물의 희생자들에 대한 합동 장례식은 상흔(트라우마)을 입은 생존자들이 있는 체육관에서 열린다. 연장자인 박씨 할아버지는 손녀를 구하겠다고, 아니면 적어도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을 한다. 현서의 고모는 엄숙하게 그녀의 동메달을 제물로 바친다. <고질라>에서 이와 비견할 수 있는 장면과 달리, 이 엄숙한 장면은 곧이어 소극(笑劇)으로 해체된다. 술에 취한 둘째아들이 도착해서, 곧 형과 동생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박씨 가족 전체는 체육관이 방역을 위해 격리되는 순간에 광분한 채 바닥에 뒹군다. 어떤 이성적인 설명도 없이, 괴물은 알려지지 않은 바이러스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숙주(host: 괴물의 영어판 제목은 <The Host>이다- 역자)는 그 괴물인가, 아니면 한국사회인가?
박씨 가족의 시각에서 보면, 괴물은 그들을 압제하는 모든 종류의 비이성적인 힘을 상징한다. 정부의 관리(권위자)는 본질적으로 괴물을 대신해 행동하는 주체이다. 정부 관리들이 염려하고 있는 주안점은 현서로부터 휴대폰 연락을 받은 뒤 탈출하려고 애를 쓰는, “오염된” 박씨 일가를 잠잠하게 만드는 일이다. 괴물이 희생자들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 박씨 일가는 잃어버린 현서를 찾기 위해 탁한 한강을 헤집고 다닌다. 한편, 정부 관리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찾아다니기에 여념이 없다. 사악한 미국인 의사들은 바이러스를 찾기 위해 심지어 한 남자의 머리에 드릴로 구멍을 뚫을 계획까지 세운다. “바이러스는 필히 그의 뇌를 침범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보랏이 말한 “테러/공포를 이용한 전쟁”이다.
관료주의와 미국에 대한 비릿하고 강렬한 혐오
전작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에서 애완견을 찾아다니는 절박한 사람과 연쇄 살인범을 다룬 바 있는 봉 감독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조역들, 그리고 일상을 통합시키는 데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못한다(그러한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미국사회 내에서 B급의 사회학적 충격을 전달하는 데 달인인 조지 로메로와 래리 코언, 그리고 조 단테 감독보다 더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산한 생화학 공포가 저급한 (특수)효과와 부적절한 음악에 의해 농락당하듯이, 사실적인(자연주의적) 공포 대처의 방식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슬랩스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괴물>은 독창적이고 잊혀지지 않는 방식으로 역겨움을 준다. 예컨대, 괴물이 인간의 뼈와 소화되지 않은(혹은 미생물로 분해되지 않은) 맥주 캔을 토해내는 장면이 그러하다.
저 캔이 중요하다. 한국은 누군가의 유독물 폐기장으로 상정되어 있다. 미국과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은 한국 정부 관리들은,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이름을 가진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할 계획을 세운다(봉 감독이 한국의 좌파정당 민주노동당의 당원이라는 것도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에이전트 옐로우를 뿌리는 것을 반대하는 항의 시위와 경찰들의 폭동, 그리고 박씨 가족의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마지막 싸움이 혼재해 있다. 봉 감독은 후한 감독이다. 비록 <괴물>이 틀에 박힌 문법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봉 감독은 특징적으로 각 장면에 기이한 웃음거리를 덤으로 얹어준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가 일상적인 곤경에 바탕을 둔 판타지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준다.
괴물만큼이나 형태를 종잡을 수 없는 영화 <괴물>은 그 자체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흥미로운 요소를 갖고 있다. 그것은 세계간의 전쟁도 아니고, 아무리 재미있다 한들 야영지에서 벌어질 법한 일도 아니다. 멍청한 관리와 유독성의 재앙에 관해서 <괴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역겨울 만큼이나 너무 비릿한 느낌이다. 강한 혐오도 일종의 저항인가? 봉 감독의 재앙 소극은 얼어붙은 한강을 롱숏으로 잡으면서 끝맺는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진창 밑에서 스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봉 감독의 영화일 것이다. 번역 하인혜/ 2007.3.6 <빌리지 보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