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스릴러도 좋지만 내공보다 욕심이 앞서면 곤란하다. <푸코의 진자> 중엔 디오탈레비와 아르덴티 대령이 수의 신비를 논하며 성당기사단에 관해 추론하는 장면이 있다. 성당기사단원 수인 36을 분해하고 더하고 곱하며 역사를 관장하는 신의 조화를 짜맞춰내는 이 대목에서 이들은 순수한 지적 쾌감을 넘어서는 신성한 황홀경에 빠진다. <푸코의 진자>의 기지는 기기묘묘한 숫자놀음을 절묘한 지적 감동으로 받아들일지 썰렁한 궤변으로 넘길지를 독자의 몫으로 남기지만, 짐 캐리의 심각한 스릴러 <넘버 23>은 줄곧 “이거 봐, 정말 교묘하지?”라는 믿음을 강요하다 썰렁하게 끝난다.
월터 스패로우(짐 캐리)의 평온한 일상은 부인 아가사(버지니아 매드슨)가 사온 한권의 책으로 무너진다. 저자도 출판사도 불확실한 극중 소설 <넘버 23>은 “숫자 23의 법칙이 만물에 들어 있다”는 기묘한 망상 이야기다. 월터는 주인공 핑거링에 대한 묘사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고 이게 자신의 이야기라고 확신한다.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각 자리 합도, 이름 철자를 숫자로 치환한 합도 23인 걸 깨달은 월터는, 착란에 빠져 애인을 살해하는 소설의 핑거링처럼 자신도 아내를 살해하는 환상에 시달린다. 월터가 책의 저자를 찾아나서자 미스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그 앞에 잔혹한 진실이 밝혀진다.
조엘 슈마허 감독과 신인 각본가 펀리 필립스의 <넘버 23>은 “세상은 23의 법칙으로 지배된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9·11 테러일(2+0+0+1+9+11=23), 타이타닉 침몰일(1+9+1+2+4+1+5=23), 인간의 체세포 염색체 수(23쌍) 등을 동원한다. 하지만 한번쯤 두뇌를 혹하게 하는 수 논리의 융단폭격은 영화 속 살인사건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몇개의 맥거핀을 차례로 던지며 치달은 마지막 반전도 제법 낯익다. 미스터리의 짜릿한 쾌감은 부실하고, 결말에선 모든 사건이 ‘살인한 자 벌받으라’는 구태의연한 도덕률로 귀결돼 관객을 맥빠지게 한다. 코미디 이상의 역량을 보여온 짐 캐리가 <넘버 23>으로 스릴러 연기에 도전했지만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을 발굴하기엔 적절치 못한 무대였던 것 같다. 로튼토마토닷컴의 162개 리뷰 중 149개가 혹평인데, (1+6+2)+(1+4+9)=23이니 이것도 23의 법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