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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우정의 연대기 <타인의 삶>
김혜리 2007-03-21

옛 동독의 비밀경찰과 예술가가 주고, 받은 기이한 우정의 연대기. 체제는 짧고 예술은 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엿보기와 엿듣기를 다루는 영화는, 예상치 못한 심리적 유대의 이야기로 전개되곤 한다. 역전된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납치범에 동화되는 현상)과 비슷한 증상이, 엿듣고 훔쳐보는 쪽에 나타나는 것이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건너편 집 여자를 엿보는 남자 토멕은, 보는 것을 아는 것과 동일시했고, 다시 그것을 사랑과 혼동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에 나오는 고독한 도청 전문가 해리는, 그런 함정을 알았기에 자신이 엿듣는 내용에 무관심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통일 5년 전 1984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에서 도청은, 공무다. 1980년대 중반 동독에서는 9만명이 넘는 비밀경찰(슈타지)과 약 17만명의 정보원이 활동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밀고로 유지되는 세계에서는 더 끈덕지게 의심하는 자가 유능한 멤버다. 주인공 게르트 비즐러(울리히 뮈헤)는 탁월한 감시 및 심문 실력과 정치적 신념으로 무장한 비밀경찰. 영화는 비즐러의 명인다운 솜씨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주장하는 용의자를 그는 단숨에 제압한다. “그럼, 우리 정부가 무고한 인민을 멋대로 체포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구금 사유입니다.” 그리고 48시간의 심문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다.

어느 날 극장을 찾은 비즐러는 “서방에서 읽히는 공산권 문인 중 유일하게 체제에 동의하는 작가”인 게오르그 드라이만(세바스찬 코치)과 스타 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마르티나 게덱)를 보고, 이 모범 커플이 자신의 다음 표적임을 직감한다. 문화부 장관 헴프도 기다렸다는 듯 도청을 지시한다. 그러나 배반의 증거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드라이만은 진심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신봉한다. 그는 동독사회가 허용하는 자유 안에서 어떻게든 최선을 도모하려는 인내심 강한 예술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드라이만이 사랑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이데아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비즐러와 동류다. 두 남자는 고도의 이상주의자가 어떻게 보수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두개의 표본이다. 완벽한 감시 도청 덕에 비즐러는 이 작전의 동기가 국가안보가 아니라 크리스타-마리아에게 흑심을 품은 헴프 장관의 질투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서로 사랑하고 예술과 진실에 애착하는 두 남녀의 일상에 다가갈수록 매혹된다(영화는 비즐러의 고독하고 황량한 사생활을 틈틈이 보여준다). 권력이 애인을 욕보이고 동료를 죽이자, 드라이만은 서방 언론에 인권 침해 현실을 고발하기로 결심한다. 비즐러는 이제 ‘죄’를 눈감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의 수호천사 노릇을 한다.

<타인의 삶>은 두 타인이 서로의 삶에, 알게 모르게 끼친 거대한 영향을 보여주는 영화다. 초반 장면을 복기해보면 드라이만을 감시하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비즐러다. 이 작전이 결국 그의 운명도 바꾼 것에 비추어보면 온당한 각본이다. 헤드폰을 쓰고 어둠 속에 들어앉은 비즐러가 서서히 들리는 세계에 몰입하는 모습은 연속극 시청자와 닮았다. 훔쳐보기와 엿듣기로 이뤄진 드라마가 자주 그렇듯 <타인의 삶>도 관객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반영한다. 드라이만의 아파트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자마자 관객은 실내에서 오가는 대사와 행위의 성격을 비즐러의 귀로 검열하게 된다. 이 잠재적 규칙은, 참다못한 비즐러가 원격 조종으로 초인종을 울리거나 크리스타-마리아 앞에 나타날 때 충격적으로 깨지는데, 그의 개입은 일종의 관객 판타지 같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삶>은 인간에게 허락된 최상의 소통 방식으로 예술을 강력히 추천한다. 비즐러에게 도청은 예술과 다름없고 그의 예술은 결국 드라이만의 말라붙은 영감을 되살린다. 현실에서 제대로 한번도 대면하지 않는 두 주인공은 오직 예술- 브레히트와 베토벤, 통일 뒤 드라이만이 쓴 책- 속에서만 만난다.

가장 주목할 배우는 비즐러 역의 울리히 뮈헤. 실제로 동독 시절 비밀경찰 하수인이 된 부인에게 감시받은 경험이 있다는 그는, 발설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인물의 내적 움직임을 표현한다. 빗대자면 벤 킹슬리 식의 연기다. 크리스타-마리아는 관객이 가장 동화하기 쉬운 인물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게 소박한 소원인 그녀는, 양심적 행동과 주제넘은 영웅 행세 사이의 경계를 확신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배우 마르티나 게덱의 위태롭고 나른한 아름다움은 크리스타-마리아에 썩 잘 어울린다. 신인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33)는 19세기 바람둥이 남작 같은 화려한 이름과는 딴판으로, 보풀 하나 없이 정돈된 서사 솜씨를 데뷔작에서 선보였다. 스릴러의 기교도 효과적으로 쓰였고, 정황상 불가능해 보였던 유머마저 군데군데 보인다. 이솝우화에 버금갈 만큼 사건과 교훈이 질서정연한 나머지 다소 마음에 걸릴 정도다. 주요 인물은 모두 복합적 성격을 부여받았지만, 헴프 장관은 할리우드 식- 요즘은 할리우드에서도 드문- 악인이다. ‘돼지 같은 인간’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깨끗하고 영리한 동물에게 모욕이 될 지경이다. <타인의 삶>의 인물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협박은 그들이 가장 잘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고문의 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소리없이 참혹한 강간장면이 있다.

이 영화의 시계는 막판에 이르러 빨리 돌아간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도 성급히 객석을 벗어날 채비를 차리지는 말 것. 에필로그가 제법 길다. 게다가 안 봐도 그만인 후일담이 아니다. <타인의 삶>의 마지막 대사는, 근래 손꼽힐 만큼 함축적인 영화의 마침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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