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고 19세기 말의 발명품이다. 영화의 예술성은 비교적 나중에 드러났는데 짐작건대 그전까지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발명품 전시회를 찾을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영화가 발명품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오해가 벌어지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타당한 얘기이지만 꼭 맞는 얘기는 아니다. 피터 잭슨의 <킹콩>이 수공업적 특수효과로 만든 1933년작 <킹콩>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주장이 아니다. 거꾸로 기술 발전이 영화 고유의 예술성을 파괴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었다. 유성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의 등장에 반대했다. 정돈된 시각예술을 혼돈의 현실로 밀어넣는 시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 발전과 영화의 예술성은 양립한다는 게 정설이지만 시장에선 대체로 새로운 영화가 환대받는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 옛 영화에서 즐거움을 찾곤 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무성영화 특별전’을 보러가면서 요즘도 무성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걱정한 대로 영화제를 찾은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20세기 초의 관객이 그랬던 것처럼 깔깔거리며 화면에 반응했다. 만든 지 80년이 지난 영화들에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변함없는 호소력을 발휘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언젠가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무성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세계”라고 쓴 대목이 떠오른다. 그가 말한 세계란 어떤 것일까? 프랭크 카프라가 연출하고 해리 랭던이 출연한 무성코미디 <강자>에 나온 한 장면을 보자. 자동차에 타고 있던 주인공이 승객들에게 떠밀려서 자동차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내리막을 향하던 차에서 떨어진지라 주인공은 떼굴떼굴 굴러간다. 자동차가 커브를 돌자 벼랑 아래로 구르던 주인공이 정확히 자동차 지붕 위로 떨어지고 지붕을 뚫고 자신이 원래 앉았던 자리에 착지한다. 이런 게 물리적으로 가능할 리 없지만 무성코미디에선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일곱번의 기회>에선 버스터 키튼이 수백명의 여인들에게 쫓기는 장면이 있다. 문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서 쫓겨가는 키튼의 등 뒤로 수십개의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 이 스턴트 코미디의 대가는 동요하지 않고 바윗돌을 피해간다. 오른쪽 왼쪽 피하다가 간혹 바윗돌에 부딪혀도 늠름하다. 키튼이 벌이는 묘기를 보면 둘 중 하나의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폭소를 터트리거나 박수를 치거나. 이런 무성코미디의 장면들은 요즘 영화가 따라한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4프레임의 자연스런 움직임으론 흉내낼 수 없는 박진감이요 현실적 사운드를 배제해야만 효과적인 코믹함이다. 이런 상상력과 표현기법은 무성영화를 감상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나는 키튼의 영향을 받은 성룡 영화를 보는 것과 진짜 키튼의 영화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예술이 그리스 신화라는 정신세계의 산물이듯 무성영화를 낳은 무성영화의 정신세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무성영화의 한계가 만든 정신세계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세계에서 희로애락은 지금보다 훨씬 분명했고 인간의 몸과 표정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도구였으며 거리엔 낭만과 서정이 넘쳐났다. 그런 세상이 다시 돌아올 리 없기에 기회가 왔을 때 꼭 한번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곱번의 기회>를 보고 나오면서 만난 류승완 감독은 버스터 키튼의 <손님 접대법>을 꼭 보라며 추천했다.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