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다음은 고양이다.”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의 앞날이 심상치 않다는 풍문이 영화계 안팎에 돌았다. 당시 한 영화인은 비보도를 전제로 부천과 비슷한 사태가 고양에서 재연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2004년 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이사회는 김홍준 전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들을 ‘근거없이’ 해촉해 영화계가 불참을 선언하는 등 갈등을 빚었다. 광주국제영화제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지자체의 간섭에 영화제가 기우뚱거리는 사태를 겪었고 이후 존폐 위기에까지 몰렸다. 지자체든 영화계든 그 어느 쪽이든 영화제가 파행을 거듭할 경우 그 상처를 추스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일까.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를 둘러싼 소문은 어느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모두들 3회 영화제가 무리없이 2007년 여름에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3월2일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이사장 직무대행 이춘연)는 “고양시와의 협력관계를 일체 중단하고, 사단법인 국제어린이영화제로의 정관개정을 추진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영화제 이사회는 보도자료에서 “관련 지자체의 (영화제 개최) 추진 의지와 예산 및 행정적 배려없이 행사를 추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사회는 “8월24일부터 29일까지 예정된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월부터는 각 담당 스탭들이 실무적인 업무를 원활히 진행하고 있어야” 함에도 예산조차 보장되지 않아 “전체적인 사업기획과 내용 검토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1월29일, 고양시의회는 2007년 제1차 추가경정예산안 심의를 통해 “제3회 고양국제어린영화제의 고양시 예산을 전액 삭감하겠다”고 재차 확인했다.
대부분 부정확한 정보 근거, 프로그램 내용 언급 검열 수준
고양시와 갈라서기까지 영화제쪽은 심사숙고를 거듭한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12월15일에 이어 시의회가 두 차례나 영화제 예산 삭감 결정을 내렸지만(<씨네21> 591호 국내리포트 통화중), 이를 전후로 영화제 이사회와 집행위원회는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제의 무리없는 개최”를 위해 2월15일 강명수 고양시장과 최종 면담을 추진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행사를 치를 수 있게끔 돕겠다는 확약은 얻지 못했다. “시장은 6월에 추가경정예산안을 올리겠다고 했지만 100% 장담은 못하겠다고 했다. 예산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별다른 답변이 없더라”라는 당시 면담에 참석한 영화제 관계자의 말이다. 개막을 두달여 앞두고서 예산이 확정되는, 게다가 이마저도 결과가 불투명하다면 고양시와 함께 영화제를 치를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시의회의 예산 삭감이 근거없는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대화로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나니 허탈함 이상이다.” 김경욱 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전액 삭감 결정은 상상도 못했다고 전한다. 33개국 166편의 영화를 초청한 지난 2회 영화제는 첫해 행사보다 1만여명 많은 4만3350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어린이 관객 또한 1회에 비해 5천명가량 늘어난 2만986명으로 집계됐다. 이에 고무되어 시장 또한 영화제가 끝난 뒤 3회 영화제 때에는 3억원의 예산 지원을 구두로 약속했던 터였다. 김 프로그래머는 “3억원의 예산은 사실 바라지도 않았다. 내부적으로 지난해 수준인 1억5천만원 정도의 예산을 기대했다. 올해 전체 예산은 지난해보다 조금 늘어난 11억, 12억원 정도로 잡고, 새로운 후원사와 수익원을 찾기로 내부 합의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덧붙였다.
영화계 안팎에선 이번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여성영화인모임, 영화인회의,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영화감독조합,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등은 3월7일 성명서를 내고 “많은 영화인들과 문화인사들이 노력하여 한해 한해 성장하고 있는 영화제의 생명을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끊어버렸다”며 고양시와 시의회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들 단체들은 성명서에서 시의회의 예산 전액 삭감 이유가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며 조목조목 지적했다. 일례로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의 홍보비는 1억5천만원. 홍보비 등이 과다 책정되어 예산 낭비가 심하다고 하는데, “2006년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제영화제의 평균 홍보비는 3억5천만원”이며 비슷한 규모로 정부지원을 받지 않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또한 1억5천만원의 홍보비를 지출한다고 이들 단체들은 밝혔다.
영화계 단체들은 상영 프로그램이 적절치 않다는 시의회의 견해 또한 “대부분 정확지 않은 정보와 통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최근작이 거의 없다. 어린이영화제가 아니라 회고영화제”라는 시의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영화계 단체들은 영화제쪽이 밝힌 자료를 들며 지난해 영화제 상영작 중 2005년과 2006년에 제작된 작품은 70%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성적 학대, 가정붕괴 등을 다룬 영화들이 주로 상영되어 “얼굴을 붉히고 극장을 빠져나가는 이들이 많았다”는 시의회의 지적 또한 과도한 개입이라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장미희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전화통화에서 “보도자료 외에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상영 프로그램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은 “비전문적인 식견으로 문화에 대한 간섭을 일삼는 일종의 검열 행위”라고 말했다.
영화제 준비 도왔던 인물들의 정치적 성향 딴죽 의견도
한편, 일각에선 이번 사태가 비상식적인 ‘정치논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시의회는 실제로 정지영, 여균동 등 2004년 영화제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힘을 모은 인물들의 정치적인 성향과 영화제와의 관련성을 시의회 회의에서 우회적으로 따지기도 했다. 정지영 감독이 1차 예산 삭감 직후에 영화제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것도 시의회의 ‘불필요한 딴죽걸기’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시의회쪽은 이 같은 영화계의 움직임에 별반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다. 현정원 의원은 “영화제 개최를 막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개선해야 할 점을 지적했을 뿐인데 전혀 개선책 마련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어린이영화제 대신 단편영화제 등을 활성화하는 등의 방안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영화제쪽은 사단법인을 유지하며 영화제 개최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흔히 지자체들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곰곰이 따져보지 않는 듯하다. 한 영화제 관계자는 “영화제를 하려는 지자체는 많지만, 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는 마인드를 갖고 있는 지자체는 아직도 많지 않다”고 말한다. 영화제를 요식 이벤트로 여기는 한 이러한 파행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자체와 영화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와의 갈등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의 차이를 줄이려는 노력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가 아쉬운 건 바로 이 점이다. 영화계 단체들의 성명서가 지적하듯이, 영화인들이 영화제를 살리기 위해 발로 뛰는 동안 시와 시의회는 뒷짐 지고 구경만 했다. 문화도시를 함께 만들어갈 파트너를 잃었다는 사실을 고양시는 알고 있긴 한 걸까.
고영국제어린이영화제 관련 시의회 발언 기록
‘예산 전액 삭감은 물론’, ’꿈과 희망의 메시지 없다’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쪽이 보도자료에 첨부해 공개한 2007년 고양시의회 ‘사회산업위원회 회의록’과 2007년 1월25일 고양시의회 ‘예결산위원회 회의록’ 중 일부다.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예산 삭감을 주장했던 시의원들의 발언을 일부 발췌해 실었다. 고양시의회 홈페이지(http://council.goyangcouncil.go.kr) 회의록 검색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제는 1년에 딱 6일을 상영하고 6일 상영하기 위해서 사무실 운영비, 인건비, 기타 비용이 3억원 정도 소요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5억원 정도가 광고비, 해외출장비, 기타 이런 잡비가 소요되고 실제적으로 이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 이 영화제를 6일 동안 준비하기 위해서 든 비용은 1억3천만원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중략)… 대안을 말씀드리자면 이 어린이영화제는 전액 삭감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이 영화제를 보통 가을에 개최하니까 한두달 전에 행사에 대한 계획이라든지 집행위원회, 조직위원회를 해서 두달 전부터 이 영화(제)에 대한 준비를 하면 될 것 같고….”(현정원 의원) “…제가 볼 때는 5천여만원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최국진 의원) ∴영화제 준비는 짧을수록 좋다. 9일 동안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도 사치고 낭비다.
“…과거에 오래된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 대부분의 영화들이 다 사회주의 영화라는 것입니다… (중략)… <되찾은 생애> 같은 영화는 아이가 성고문을 받고 성적 학대를 받는 그런 영화가 되겠고,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꿈꾸는 밸리댄스>는 더 웃깁니다. 엄마는 병마에 시달리는 분이고 아빠는 정말 사회에 모든 게으른 표본으로서 보여지면서 그 아이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들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내용들이 우리 어린이들한테 무슨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겠느냐….”(현정원 의원) “1회, 2회 때 5년 전, 10년 전 영화를 상영했다는 것은 어린이영화가 그만큼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해쯤 할 때는 20년 전 영화를 끌어와야 될 겁니다. 그러면 어린이영화제가 아니라 회고영화제로 바뀌어야 되는 것 아닌가, 내년쯤 되면 50년 전 영화를 끌어와야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5년이나 10년에 한번 할 수밖에 없는 제작편수를 가진 영화제를 매년 끌어간다는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박규영 의원) “(2006년 개막작) <왕과 새>를 연출한 작가에 대한 내용을 보면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 그리모는 특히 일본 애니메니터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린이영화에 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고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작품 선정에 있어서 상당한 논란거리가 됐습니다, 저희들이 개막작품을 봤을 때.”(길종성 위원) ∴우리에게 영화제 프로그래밍을 맡겨달라. 꿈과 희망으로 보답하겠다.
“2005년도 1회 어린이영화제 했을 당시에 시에서 사업을 예산 계획해서 국·도에 올린 사업입니까 아니면 위에 내려온 사업입니까? 최초. (고양시 관계자가 시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하자)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최초 1회 어린이영화제를 할 2005년도 당시에 집행부에서 거기에 대한 프로젝트와 사업 예산을 만들어서 시에서 의결을 거쳐 도나 국가에 요청한 것이 되겠네요? 그러면 그 당시 이것을 제안하신 분이 누구신가요?”(현정원 의원) “실제 영화제를 고양시에서 시작하게 된 계기를 알고 계십니까?… (중략)… 고양시에 영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략)… 고양시에 계시는 영화인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영화인들조차도 국제어린이영화제에 대한 회의적인 내용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집행하시는 분들이 영화인들과 협력과 대화를 통해서 행사를 치른 것이 아니고 몇몇 뜻이 맞는 분들끼리 집행자로 구성이 되어가지고 하다 보니까 많은 잡음이 났던 것이 사실입니다.”(길종성 의원) ∴영화제를 만든 의도가 불순하다. 충무로도 그걸 다 알고 있다.